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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사카모토 료마 :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의 의미

고대 중세 근세 근대라는 시대를 불문하고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 1,2 위로 다투는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와 오다 노부나가라고 합니다.


글쎄요.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시대를 평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고 사무라이 시대에 거칠 것 없는 터프한 남성 이미지라고 해서 충분이 납득이 갑니다.


그런데 사카모토 료마는 군대를 움직이는 사람도 아니었고 당시 행정구역인 토사번의 중역을 맡은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근데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료마를 꼽는데는 분명 이유가 있겠죠.



▲ 사카모토 료마 (1836.1.3.~1867.12.10)


사카모토 료마를 모르는 분들도 어디서 한 번쯤은 위 사진에 보이는 인물을 보셨을 겁니다. 일본에서는 대중적으로도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상점이나 학교, 티비에서 순간 지나가는 장면 등 계속 수시로 볼 수 밖에 없는 얼굴이죠. 료마가 태어난 시기는 서양 국가들이 저마다 식민지를 건설하려 자신들보다 문화, 문명적으로 덜 발달한 개화가 안 된 국가나 지역에 통상 무역을 강요하는 시절이었죠.




▲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4척


1853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 군함 4척이 당시 일본 에도 (도쿄) 만으로 된 앞바다에 등장합니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는 증기기관이 발명되어 엄청난 사회적 변혁이 생겼죠. 그 큰 스케일 때문에 혁명이라는 말을 붙여 산업혁명이라고 부릅니다. 페리 제독이 이끄는 군함 4척도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군함이었는데 겉은 부식을 막기위해 타르를 발라놓아 흑선 (검은 배) 로 불렸습니다. 일본의 막부는 페리 제독 실력 행사에 이은 통상요구에 굴복하여 미일화친조약을 맺게 됩니다. 



▲ 쇼군을 알현하는 다이묘들


이때는 에도막부 시대인데 당시 일본의 권력구조와 행정구역을 좀 알아야 사카모토 료마의 행적을 쉽게 파악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에도 막부 시대는 사무라이 (무사) 의 시대였다고 이해하시면 된다고 말씀 드렸는데 사무라이는 봉건제에서 나온 계급입니다. 어느 국가의 과거 역사에서든 권력의 정점에 있는 황제 또는 왕과 그 밑에 신하들의 권력 분배에 따라 국가 구조가 달라지는데 일본 역사는 덴노 (천황, 일왕) 과 쇼군이라고 보시면 돼요. 덴노가 오랑캐를 정벌하라고 만든 쇼군이라는 직책이 덴노보다 권력이 커져 덴노의 조정 말고 따로 막부 (바쿠후, 야전사령부 막사) 에서 국가의 정사를 돌보고 실권을 가져가는 시기가 막부 시대입니다.



▲ 무사 (사무라이)


큰 힘을 갖고있는 쇼군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들에게 영지 (봉토) 를 하사하고 이들을 일정 지역의 우두머리를 시킵니다. 그 일정 지역을 번(藩, 울타리 번) 이라고 불렀는데 현대 일본의 행정구역 현과 비슷한 규모입니다. 그 번의 주인 (번주) 을 다이묘라고 부르고 또 제후라고 하기도 하죠. 유럽의 봉건제와 비슷하게 다이묘들은 그 지역에서 왕이나 다름 없고 뺏고 뺏기는 다이묘들끼리의 경쟁에서 무력이 중시되니 가신 (가문의 신하) 으로 농민을 착출해 무장을 시키고 무술을 익히게 만드는데 이들이 바로 사무라이 (무사) 입니다.



▲ 사진을 꽤 많이 찍은 사카모토 료마


근데 가마쿠라 막부에서 무로마치 막부 그리고 마지막의 에도 막부까지 시대가 흐르면서 사무라이들은 전문 싸움꾼 뿐만이 아니라 우리 조선시대 선비들 처럼 농민과 상공인 계급 위에 있는 상류 계층 부류를 통칭하는 말로 쓰이죠. 즉 무신 뿐만이 아니라 문신들도 사무라이이고 그들도 일본도를 차고 다녔지만 그건 무사계급에 속한 이들이 착용해야할 필수 악세사리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급이 뭉뚱그려지면 그 안에서 텃세를 부리는 기존의 정통성 있는 집단이 새로 사무라이 계급에 편입되는 집단을 구분하려고 하죠. 사카모토 가문은 원래 전당포와 포목상을 운영해서 돈을 모았는데 사무라이 계급으로 편입 되어 하급무사계층이 됩니다. 사카모토 료마의 고향인 토사 번 (현 고치현) 에는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의 차별이 상당히 심했었다고 하죠. *참고로 토사 번은 도사견으로 유명한데 토사 번 토종 개와 불독을 교배해서 만든 것이 도사견이라고 합니다.



▲ 탈번하는 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는 자신의 고향인 토사번을 무단으로 이탈합니다. 당시 다이묘의 가신인 사무라이가 무단으로 탈번하면 그 죄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사카모토 료마의 성향을 좀 엿볼 수 있죠. 듣도 보도 못한 발전된 서양 문물이 일본에 소개되는 시점에서 그런 선진문물에 꽂혀버려 탈번의 사형죄 정도로는 료마를 작은 지역인 토사 번에 묶어둘 수 없었죠. 어디에 얽매여서 안정된 삶을 살기 보다는 격변하는 시대의 파도에 몸을 던져 자신이 도모하는 일을 이루고 싶어하는 그런 유형입니다. 그 증거로 료마는 짧은 평생의 삶 동안 계속해서 신념을 이루기 위해 일본 열도를 엄청나게 돌아다닙니다. 첫번째로 료마의 이러한 도전정신을 일본인들이 좋아하고 있죠.



▲ 사쿠라다몬가이의 변 (1860.3.24)


동아시아에서 맹주 노릇을 하던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두 번이나 상대도 안되게 완패하는 걸 본 아시아인들에게 충격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죠. 그만큼 서양 국가들의 선진적인 문물에 대한 경외심이 들었을 겁니다. 당시 에도 막부에서는 쇼군이 실권을 잡고있었고 덴노 (천황, 일왕) 은 허수아비나 다름 없었는데 세계 각국의 통상 요구에 막부는 불리한 조약을 맺어 정권연장을 꽤합니다. 페리 제독의 방문 때 맺었던 미일화친조약에서 더 일본에 불리한 미일통상조약을 1858년 맺게 되는데 다른 서양 국가들도 일본에 일제히 그런 불리한 조약을 강요하고 쇼군의 중신인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가 그 조약을 조인 하게되니 많은 무사들의 막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사쿠라다 문 밖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이 터지죠. 한 사무라이에 의해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이 나오스케가 참살당합니다.



▲ 당시 웅번들 (웅대한 번) 사쓰마, 조슈, 토사


당시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 (도쿄) 에서 거리가 가장 먼 사쓰마 번, 조슈 번, 토사 번에서 반 막부 세력이 성장하고 이이 나오스케를 참살한 무사가 이 웅번 중에 한 지역의 출신인 게 단순한 우연은 아닙니다. 전국시대를 평정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등 다이묘부터 3등 다이묘까지 나누어 공이 가장 큰 사람은 에도 근처에 영지를 하사하고 가장 공이 낮은 사람에게 에도에서 먼 서쪽에 영지를 하사하거든요. 그리고 에에야스는 다이묘들이 힘을 키워 반란을 일으키는 행위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참근교대라는 정책을 실시하는데 전국의 다이묘들은 1년에 한 번씩 에도로 올라왔다가 그들의 가족, 가솔들과 번갈아가며 교대해서 본인의 영지로 다음 해에 돌아가는 게 바로 참근교대입니다. 이게 상당히 고생스러운 일이었죠. 시간, 돈, 물질이 엄청 소모되는 고행길이었을 겁니다.



▲ 기도 다카요시 (1833.8.11.~1877.5.26)


일본의 막부가 자꾸 외세에게 굴복하여 불공정한 조약을 맺는 것을 지켜보게된 조슈 번, 사쓰마 번 등의 무사들은 막부를 타도하고 원래 정권을 덴노 (천황, 일왕) 에게 돌릴 것과 외세를 배척할 것을 주장하는 존왕양이 정신을 내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위 사진에 보이는 기도 다카요시 (가쓰라 고고로) 라는 조슈 번의 중역을 구심점으로 무력으로 막부를 쳐부술 것을 결의하고 조슈 번 자체적으로 자체 개혁을 통해 군사력을 상승시키죠. 쉽게 급진파라고 보시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 사이고 다카모리 (1828.1.23.~1877.9.24.)


사쓰마 번에서 중역을 맡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우 키치노스케) 가 이끄는 사쓰마 번은 조슈 번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온건 세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똑같은 존왕양이를 주장했지만 도쿠가와 가문의 막부와 협상을 시도하죠. 사쓰마 번은 처음에 덴노 (천황, 일왕) 에게 먼저 접근하여 외세를 물리칠 과제를 풀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지만 도중에 영국군과의 전쟁에 참패하여 덴노와의 의견조율권을 조슈번에게 빼앗긴 후 슬슬 조슈 번과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 금문의 변 (1864.8.20) 사쓰마 vs 조슈


덴노를 등에 업은 조슈 번은 자신들의 급진적인 존왕양이론을 실행하기 위해 우선 에도막부 1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덴노에게 알현하게 하고 조슈 번 구역인 시모노세키항을 항해 중이었던 미국 상선에게 포격을 하는 등의 실력 행사를 하게 되죠. 당장 서양의 군대가 일본을 응징하는 움직임이 보이자 당황하는 조정 (덴노 정부) 과 입장이 난처한 막부 (도쿠가와 가문) 에 더해서 덴노를 차지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사쓰마 번까지 조슈를 적으로 돌리고 조슈 번은 당시 교토에서 쫓겨납니다. 이에 또 다시 무력으로 반발하려던 조슈 번은 금문의 변에서 패합니다. 사쓰마는 덴노를 부추겨서 조슈 번을 덴노에게 대항하는 역적으로 (조정의 적, 조적) 천명하게 하고 이에 조슈 번의 본토는 막부 군에 토벌되기 시작하죠.



▲ 삿초동맹 (사쓰마 조슈 동맹 1866.3.7)


완전히 물과 기름, 견원지간 사이가 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 이 둘을 중재한 게 바로 사카모토 료마죠. 사카모토 료마는 새로운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의 시스템을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구조로 바꿔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600년에 넘게 지속되어 온 막부 시스템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선진적 구조를 짜야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부 타도를 외치고 또 그럴 가능성이 큰 웅번들 (큰 힘을 가진 번) 인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싸우고 있으니 우선 이 둘을 중재해야 했었죠.



 삿초 맹약서 뒷면에 사카모토 료마가 배서를 통해 인증함


사카모토 료마는 우여곡절 끝에 사쓰마 번의 중역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 번의 중역인 기도 다카요시를 만나게 해서 삿초 동맹 (사쓰마 조슈 동맹) 을 맺게 합니다. 일본인들은 사카모토 료마가 이 삿초동맹을 이뤄낸 점을 상당히 높이 삽니다. 대업을 위해 분쟁을 조정하고 하나로 묶어 힘을 결집시키는 이 능력은 사실 극도의 칭찬을 받아도 아깝지 않다는 건 개인적으로도 동의 합니다.



▲ 사카모토 료마의 선중팔책


사카모토 료마는 자신의 스승이나 기타 현자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또 자신의 생각을 정리 통합하여 선중8책이라는 새로운 일본의 비전을 내놓습니다. 선중팔책은 배 위에서 생각한 8개의 책략이라는 뜻인데 후에 메이지 정부의 기본 바탕 이념이 되죠. (신정부강령8책) 대략적인 내용은 막부 등의 기존의 도움이 안되는 구조를 없애고 의회 (의원) 설치, 외국과의 정당한 조약, 해군대 창설 등입니다. 일본을 현대식으로 합리적이고 강하게 만드는 포괄적인 생각들이죠. 



사카모토 료마는 다른 지사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독특하죠.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맞닥뜨려 관련된 사건 등 이슈 문제들를 하나씩 해결하고 조정하고 궤도를 수정해나가면서 성장해 나가는게 일반적인데 사카모토 료마는 큰 비전 하나를 딱 세워 놓고 정면돌파 합니다. 좌절하거나 다른 길로 돌아갈 법도 한데 말이죠. 그냥 권력을 쫓아 가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료마는 정말 자신들의 공동체인 일본인을 위한 삶을 살았다는 게 일본인들에게 와 닿게 되는 부분입니다.



▲ 통치권을 덴노에게 넘기는 쇼군 (대정봉환)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동맹을 맺게 되니 막부로써는 부담을 넘어서 상당히 큰 위협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때문에 삿초동맹 직후 사카모토 료마가 머무는 데라다야 여관에 자객이 침투하여 료마 암살을 시도하죠. 그리고 사쓰마와 조슈가 동맹을 맺게 되고 사쓰마의 지원을 받은 조슈의 막부 공격에 막부의 1차 저지선이 무너지니 (코쿠라성 함락) 이때부터 분위기는 웅번쪽으로 기울고 막부는 크게 동요하죠. 그러나 아직 정황을 살피며 눈치를 보는 수 많은 번주 (다이묘) 들 세력이 막부를 지원할 수 있으니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상황에서 무력으로 막부를 응징하자는 조슈 번 중역들과 사쓰마 번 중역들을 또 다시 사카모토 료마가 나서서 말립니다.



 토사 번주가 쇼군에게 쓴 대정봉환 권유서


료마는 무력 보다는 막부 스스로 자진해서 권력을 내려놓게 하자는 '대정봉환' (大政奉還) 생각을 주장합니다. 토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는 사카모토 료마의 건의를 받아들여 쇼군에게 대정봉환을 권유하고 결국 도쿠가와 막부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자신의 통치권을 덴노 (천황, 일왕) 에게 반환합니다. 대정봉환은 상당히 의미가 큽니다. 외세의 군사, 무역 압박을 받는 당시 일본이 내전을 통해 힘을 소모한다면 결국 좋은 건 서양 세력일 뿐이니깐요. 여기서 또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인의 마음을 울리죠.



▲ 사카모토 료마의 죽음 (오미야 사건)


하루 아침에 막부가 없어지니 막부에 소속되어 호위호식하던 신하들이나 사무라이들은 졸지에 거리에 나 앉게 되었습니다. 대정봉환으로 쇼군이 실각하고 난 한 달 뒤에 사카모토 료마와 료마의 동지 나카오카 신타로가 머물던 오미야 여관에 갑자기 자객 3명이 들이닥치더니 료마와 신타로를 베어버립니다. 료마는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죽어갔다고 하고 나카오카 신타로는 중상을 입어 3일간 사경을 헤매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범인은 누구? 유력 용의자 단체 미마와리구미


나카오카 신타로가 3일간 생존하여 당시 정황을 사람들에게 설명했다고는 하나 누가 자객으로 오미야 여관에 침투하여 사카모토 료마를 베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죠. 사카모토 료마는 3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렇게 죽게 됩니다. 이런 인물이 묻힐 뻔 했는데 19세기 후반 한 신문기자에 의해 발굴되더니 시바 료타로 라는 일본의 유명 작가의 소설 '료마가 간다'로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계속해서 티비에서, 책에서, 각종 여러 자료들로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죠.



▲ 사카모토 료마 사후 일어난 보신전쟁 (1868~1869)


사카모토 료마 사후 1867년 1월 9일 메이지 덴노를 구심으로 하여 사쓰마 번과 조슈 번 중역들 주도 하에 메이지 유신을 감행합니다. 후에 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먼저 헌법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때 일본 정부 내각은 대부분 사쓰마와 조슈 출신들이 차지하죠. 거기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유명인인 조슈 번 무사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도 있습니다. 일본 초대 내각 총리를 역임하죠. 막부는 해체시켰지만 인재를 판단하는데 지금의 블라인드 면접과 비슷한 개념으로 오직 실력만 보려고 하던 사카모토 료마는 쇼군이었던 요시노부 인재를 다시 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신전쟁 삿초도 군의 추격로


조슈 번과 사쓰마 번 사람들의 생각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때문에 사카모토가 죽고 난 뒤, 삿초동맹 중역들은 요시노부의 완전한 은퇴를 주장했고 이를 거부한 요시노부 막부 잔존 세력과 다시 전쟁을 합니다. (보신전쟁 1868~1869) 결국 막부 세력의 항복으로 끝나긴 하죠. 여기서 일본인들은 또 료마를 높게 평가합니다. 자신들의 원수를 응징하는 것보다는 실력을 보고 인재를 아끼는 마음을 높게 산 것이죠.



▲ 조선정벌 (정한론) 시기 문제로 논쟁하는 급진파와 온건파


메이지 유신 이후에 완전히 바뀌는 일본 이야기는 우리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내용입니다. 왜냐면.. 얘네들이 조선을 침략해서 식민지로 삼고 만주, 중국 동부, 동남아시아 까지 전부 먹어버리는 이야기를 교과서에서 배우죠. 당시 세계 정세의 흐름은 산업화의 큰 변혁의 바람에 국가의 몸집은 바람이 들어가 커지게 되고 이런 강대국들에게 먹일 원료와 이들이 배설하는 물품을 소비할 시장을 필연적으로 확보해야할 그런 시기였습니다. 강대국들은 누구도 예외가 없었죠. 



사카모토 료마가 염원하던 강한 일본은 실제로 이루어졌고 강대국에 불평등 조약을 맺어 피해를 보던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반대로 개화와 개혁이 덜 된 동아시아국들을 억압하고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그래놓고는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 모른다고 조선 사람들에게 식민사관을 세뇌시키려 정체성론, 타율성론, 당파성론을 주장하기 시작하죠.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는데 이때 일본인은 정도의 차이뿐이었지 지도층이건 서민들이건 중산층이건 대부분 일본 제국주의가 세계로 뻗어나가길 바랐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되면 일본 자국민들의 삶은 눈에 띄게 윤택해지기 때문이었죠.



▲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료마의 정신은 무엇?


정리하자면 일본인들은 사카모토 료마의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진심어린 마음,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노력과 행동, 사카모토 료마가 추구한 방식을 좋아합니다. 결과론적으로 사카모토 료마의 이러한 일들이 대부분 옳았으며 동쪽 가장 끝에 있는 별 볼일 없던 섬나라 일본이 이런 사고방식과 이념을 통해 전세계 최강 수준의 경제력과 국력, 소득수준 등을 보유하게 됐다는 것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사카모토 료마의 삿초동맹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에 국론이 분열되어 있다가도 외부로부터 일본에게 위협이 가해지면 사카모토 료마의 공동체 결집을 통한 자강 정신이 또 다시 일본 국민들을 똘똘 뭉치게 할 겁니다. 



▲ 미래 한반도와 일본 열도 거주자들의 운명은?


이건 우리 한국인에게 그렇게 좋은 소식은 아닙니다. 전쟁은 경제 상황 때문에 생기기 때문에 앞으로 전세계의 경제가 계속 좋지만은 않을 테니 전쟁은 반드시 다시 일어납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이기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상대 분열로 얻는 득이 가장 크죠. 그런데 사카모토 료마가 자국에 그럴 가능성을 확 줄여주고 갔습니다. 1,000년의 방패를 일본 열도에 꽂아놓고 간 사카모토 료마. 이 사람을 알아야 되고 일본인들이 료마의 정신을 동경하는 이유를 알아야 앞으로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 상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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