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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발해 멸망이 우리에게 주는 근본적 의미

2016년 겨울, 국정 역사교과서에 기존 '남북국 시대'라는 발해와 신라시대의 명명을 '통일신라와 발해'라 기재한다고 발표가 되었다. 


발해라는 국가는 과거 국영방송인 KBS에서 '대조영'이라는 사극으로 방영되며 높은 시청률을 보였기도 하고 그간 중국의 대 동북공정에 대응 전략으로, 발해가 우리역사인 논리적 근거 등을 다양한 매체에서 자주 접할 수 있었기에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발해는 분명 한국의 역사라는 확고한 관념이 흔들리지는 않고 견지될 듯 보인다.


그런데 동북공정 중국 주장에 대한 반발작용에 의해서 발해의 중요성을 논하거나, 북한을 인정하게 된다는 남북국 시대 명칭의 우려에 대한 논점들보다 더 원칙적이고 중요한 사안이 있다. 발해의 멸망이 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 발해 고왕 대조영 (?-719)


발해를 건국한 발해 고왕 대조영은, 사실 그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위한 자료가 상당히 부족하기에 자세히 알 수 없는 게 현 실정이다. 다만 중국의 정통 역사책인 24사서 중 하나인 《구당서》, 《신오대사》 에서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말갈계 고구려인 정도로 추정하고있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 당하고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에 의해 분산되어 관리받는다. 망국의 유민들이 결집되어 부흥운동 등으로 또다시 들고 일어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그런 정책을 펼친 것인데, 대조영도 아버지 걸걸중상과 함께 반란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큰 인물이기에 당나라에 의해 요동지역쪽의 영주로 끌려가게 된다. 




▲ KBS 대하 드라마 대조영의 포스터


영주에서 당나라의 핍박에 못 이긴 거란족의 난이 있게 되자, 고구려 유민을 이끈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 그리고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등이 유민들을 이끌며 동쪽으로 달아나고, 당의 여황제 측천무후는 당나라 장수 이해고에게 이들을 토벌할 군대를 보내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이해고는 대조영과의 전투에서 패하게 된다. 이때부터 대조영의 입지는 확고하게 굳어지며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의 리더로서 자리를 공고히 한다. 그 후 698년에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하여 지금 중국의 옌볜조선족 자치구 지역일대로 보는 동모산에서 '진국(발해)'을 건국하게 된다.




▲ 발해 장문휴 장군의 당나라 산둥반도의 등주 공격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는, 발해의 동쪽에 위치한 흑수말갈과 당나라가 긴밀히 밀착하고 있던 상황에서 흑수말갈이 발해로의 사신왕래를 통한 상황보고가 없자 곧 당나라와 흑수말갈이 합심하여 발해를 공격할 것으로 보고 먼저 발해 장수 장문휴를 시켜 당나라 산둥반도에 있는 등주 해군기지를 공격하게 하는데, 등주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성을 함락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등주는 당나라 최고의 수군이 있는 항구도시이다. 여기서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는 전함과 수송선들이 출정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발해 무왕의 당나라 등주 공격은 우리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중원 본토를 공격하여 큰 성과를 올리는 사례이다. 물론 당시에는 위 지도에서 보이는 거란과 그위에 돌궐까지 당과 반목하고 있었기에 발해 또한 당에게 선제공격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됐건 것도 사실이다. 




▲ 발해 무왕의 중국 본토 마도산 공격


당시 여러모로 이민족의 침입을 받게되는 당은 신라에게 발해의 후방을 치기를 요청하지만, 신라는 추위때문에 발해로의 대규모 원정이 실패하고 돌궐과 거란의 마도산 공격에 발해의 무왕도 합세하여 마도산 전투의 승리에 기여를 하게된다. 이 시기부터 당은 발해의 내정간섭을 크게 줄이게 된다. 



군사력을 바탕으로한 당에대한 발해의 외교의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여 발해 문왕 때에는 발해의 문화가 꽃피울 수 있는 태평성대 시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후에 발해가 해동성국이라 불리우는 이유도, 거란과 돌궐이 당에 제압된 뒤로는 발해가 섣불리 당을 자극하지 않고, 당도 발해에게 몇 번의 공격을 받은 후, 굳이 발해가 동방의 지역을 할거한 독자세력임을 부인하지 않는 상황에서 꾸준하고 안정된 당과 발해의 교류가 진행 된 것이었다.




▲ 백두산 천지


그렇게 동북아시아에서 자신만의 역사를 써내려가던 발해는 돌연 926년에 멸망하고 만다. 유득공의 《발해고》에 의하면 발해의 멸망 그 이후 발해 부흥운동으로 정안국, 대원국, 흥료국 등이 건설되지만 오래가지 않아 이 국가들 또한 망하게 된다. 발해의 멸망 원인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어떻게 당시 거대한 국토를 지닌 발해가 거란에게 그렇게 힘없이 무너졌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학자들의 연구가 지금도 계속되고있다. 단 당시 위 백두산 천지 사진이 보이는 백두산이 폭발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두산 폭발로 동북아 지역의 기온이 떨어지게되고 이로 인해 농작물이나 축산활동이 저해가 발생되어 민심의 동요로 결국 발해는 거란을 막을 수 있는 국력을 결집시키지 못했다는 의견이 있다. 



▲ 과거 시기별 세계의 기온에 따른 인류의 흥망성쇠


사실 날씨가 추워지면 북방유목민족은 축산이 되지않아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 농경국가를 침범하여 자신들의 안위를 도모하는데, 이는 역사에서 지구의 기온과 밀접하게 연관되 반복되어 이루어진 사실이다. 때문에 백두산 폭발로 인한 기온하락을 발해의 멸망원인 중 하나로 보는 학설이 허무맹랑한 주장은 아니고, 꽤 합당하다고 보여진다. 




▲ 요 태조 야율아보기


그러나 직접적으로 발해 멸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거란족에 의해 발해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쇠퇴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거란족은 야율아보기의 부족 통일 작업으로 인하여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게 된다. 



백두산 폭발에 의한 기온하락과 농경국가의 쇠퇴의 원인이 당나라를 쇠락하게 하였다 하더라도, 발해 또한 국가의 대부분의 구성이 유목친화적인 말갈족이므로 시기적 이점을 업고 거란족이 강성하게 성장하는데 반해 발해는 그렇지 못했기에 발해 멸망의 그 원인으로 발해 지도부의 내부적인 권력, 세력다툼 등으로 인한 국무의 부재로 거란의 공격에 제대로된 힘 한 번 못쓰고 대인선을 마지막 발해 왕으로 발해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는 의견에 동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발해의 영토


발해가 있던 시대의 통일신라와 발해 남북국 영토는 우리 대한민국 전신 국가들이 가졌던 그 어떤 영토 크기보다 가장 넓은 땅 면적을 자랑한다. 고구려보다도 넓고 발해의 국왕들은 자신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일본과의 외교 문서 등을 통해 명백히 밝히고 있으며, 고구려 양식의 온돌과 석등 그리고 돌사자상 등으로 인하여 문화적으로도 고구려의 계통을 잇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발해는 단지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서 많이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기록되지 많지 않으면 그만큼 우리의 관심에서 서서히 멀어져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발해의 무왕은 우리 역사에서 유독 이목이 집중될 만한, 동북아시아 세력판세를 정확히 읽고 발해 자신의 국력 또한 염두해 둔, 당나라의 등주와 마도산을 선제 공격하여 당나라에게서 발해에 대한 내정간섭 배제라는 실리를 얻게된다. 이런 통찰과 상무적 정신은 많은 기록으로 꾸준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조선의 역사에서는 거의 없던 일이니, 발해는 우리에게 상당히 유의미한 내용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겠다.


2016년 말, 국정교과서 논란에서는 남북국 명칭과 통일신라와 발해라는 명칭의 대립각이 세워지고있다. 국가 내에서 이런 무의미한 논쟁보다는, 발해의 역사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도록 발해역사 사료를 발굴하는데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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