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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윤관장군 별무반과 여진정벌을 통한 동북9성의 의미

아직도 관련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정벌하고 세운 동북9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내용이다. 동북 9성의 위치를 두고 두만강 유역이었다고 하는 말이 있고, 함흥평야쪽이라는 주장과 두만강 이북 또는 함경도쪽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어쨌든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정벌하였던 땅은, 동북9성에 관해 여러 설이 말하는 위치 대부분이 현재 북한의 영토이며 한반도의 영토로 되어있다.


윤관장군이 여진족을 상대로 전투를 준비하며 짰던 군제인 별무반과, 군사력측면 그리고 동북9성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게 되는 것일까.



▲ 윤관 (1040-1111)


윤관 장군은 고려 왕 문종 때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역시 윤관 장군도 서희 장군이나 강감찬 장군처럼 문관 출신이다. 당시 고려는 따로 무과 과거시험이 없었고 무신에 대한 차별이 꽤 있어서 고려 중반기에 차별 대우 때문에 열받은 무신들의 의한 정변도 일어나게 되는데 이로인하여 오랜 세월동안 무신들에 의해 고려 정국이 돌아가게 되기도 한다. 아무튼 윤관 장군은 고려 왕 숙종이 왕위에 오른 것을, 거란족의 요나라와 송나라에, 성공적으로 보고를 마치게 된다. 이 시점을 시작으로 윤관 장군 자신의 입지를 굳히게 되는데 또한 윤관 장군은 고려 왕의 왕권 강화에 힘써 숙종과 예종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다양한 벼슬을 하기도 한다.




▲ 당시 동북아시아 국가 및 여진 세력도


고려의 국경선에 설치된 천리장성 위로 여진족들이 띄엄 띄엄 거주하고 있었다. 고려로서는 자체적으로 황제국을 칭하고 있었기에 (외왕내제) 여진족들을 마치 제후국처럼 여기고 그들에게 보상을 주어 정착시키기도 하고 여진족 족장들을 회유하여 그들에게 작위나 품계를 내려 관직을 하사하기도 하여, 고려에게 감히 덤비지 못하게 만들고있는데 얼마 안 가서 우야소라는 인물이 여진 부족들을 하나 둘 통일하더니 점점 강성해져서 고려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 우야소 (완얀 우야수)


이때부터 고려 내에서 여진족 정벌론이 힘을 얻어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여진족에 대해 그동안의 회유나 포상등을 통한 간접지배 형식을 벗어나서 군사력으로 직접타격을 통한  여진족이 고려에게 완전한 복속을 시키는 형태를 만들려 한 것이다. 윤관 장군 등은 여진족을 정벌하러 몇 번의 출정을 하였으나 패배하고 돌아온다. 윤관 장군이 패배한 원인을 스스로 살펴보니 여진족과 같은 북방민족들은 기마전술에 뛰어나기 때문에 보병을 주로 편성한 고려군대가 상성상 상당히 불리하다는 것을 원인으로 파악하여 군 편제를 바꾸고 별무반이라는 대 여진족 맞춤형 군대를 만드는 것을 고려 왕 숙종에게 건의하게 된다.



▲ 별무반


기병으로 이루어진 신기군과 보병으로 이루어진 신보군 그리고 승병으로 이루어진 항마군을 별무반이라고 하는데, 고려 군대의 정규 편제인 2군 6위와는 다르게 별도로 구성했다고 해서 이름이 별무반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소규모 특수부대는 아니고 당시 고려로서는 별무반과 정규부대를 합하여 있는대로 고려 남자들을 긁어모아 징집하여 17만명이라는 대규모 별무반 군대를 구성한다. (별무반만 17만이라는 의견도 있다) 절에서 도를 닦거나 노동하는 사람들까지 불러모아 항마군을 만든 것을 보면 윤관 장군에게 어느정도로 단호한 필승결의가 있었을지 짐작이 간다.



▲ 척경입비도 (동북9성의 성과를 올리고 선춘령에 비석을 세우다)


사실 기병위주의 여진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윤관 장군은 고려의 특수부대로 별무반을 구성하였지만 유목민족인 여진족에게 농경민족인 한민족이 기마술로 맞불을 놓는다는 것은 번데기앞에 주름잡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보다는 대규모 징집을 통하여 3년동안 고된 훈련을 하고, 강노와 경궁 등의 좋은 무기를 가지고 여진족을 상대하여 전투 초반 정확한 계책으로 빠르게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동북9성을 쌓게되는 윤관의 대 여진 전쟁 준비과정과 선진무기 보급에 그리고 전략 전술에 초점을 맞춰 봐야 할 것이다.




▲ 손자병법


그동안 여진과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한 윤관 장군은 별무반을 구성하여 대대적인 여진 진영으로의 공습을 하기 직전에, 여진족 부장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그들을 취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고 나서 여진족 군대의 리더들이 제정신이 아닐 때, 빠르게 여진족 진영을 급습하여 여진족 병사들이 혼비백산 하는 기회를 틈타 맹공을 펼쳐 사실 무난하게 동북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병법의 바이블이라는 손자 병법에서 상대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를 속여 승리를 취하여야 한다는 전술 병법 이론을 성공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 윤관 장군 동상


윤관 장군은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하여 적절한 계책으로 동북쪽의 여진족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동북9성을 세웠으나 결국엔 그 지역의 정착민이었던 여진족들의 끊임없는 동북 9성에대한 공격으로 인한 고려의 재정고갈과 인력손실로 민심이 동요하자 고려는 다시 여진족들이 요청하는 강화에 응하여 동북9성을 내주는 대신 조공을 받기로 한다. 그리고 조만간 여진족은 아골타라는 영웅이 나와 금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빠르게 확장하여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을 압박하며 고려에는 사대관계를 요구하기까지 이른다. 


무엇을 위한 윤관의 여진정벌이었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서 영토를 확장했는데 그 확장된 국토를 유지하지 못하여 다시 2년만에 여진족에게 내주게 되는 것은 후에 조선의 왕 세종 시기 4군 6진 개척으로 인한 영토 회복 때까지 잃어버린 동북의 땅이라는 역사적 빈틈이 상당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 당시 동북아시아 할거세력 관계도


당시 국제 정세는 거란족의 요나라와 송나라가 대치하고있고, 여진족은 세력이 크지 않아 거란족의 눈치를 매번 살펴야 하던 때이다. 동북아시아 땅을 여러 민족이 할거하고 있던 시대에 가장 큰 무기는 첫째로 외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군사력 없는 외교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윤관 장군의 별무반 구성은 이루되 직접적인 여진족 타격으로 인한 고려의 전력 낭비보다는 외교를 통하여 주위 외세의 세력간 국력소모를 유발시켜 어느 한 세력이 유별나게 성장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반대로 여진족을 타격 해서 동북지역을 먹었다면 그 영토는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영토를 넘겨주는 일은 결국 국가가 가진 힘의 원천을 스스로 내어 주는 것이고 그 내어준 영토를 먹은 국가는 강성해질 개연석이 무척 높기에 그 땅을 내어준 국가가 곧 스스로 패착을 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몸소 겪게 된다. 결국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몽골이 등장하기 전까지 동북아시아 지역의 패권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동북9성을 되찾은 여진족이 그것을 마중물 삼아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학설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 동북아시아 위성 지도


안타깝지만 현재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있다. 이 둘이 계속 견제하며 상당수의 재정을 군비로 쏟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낮았다면 재원을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에 둬서 국가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상황을 기회비용으로 날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남과 북이 대치하며 소모전을 계속하게되면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주위에 위치한 국가들이고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한국과 북한이 될 것이다.



때문에 국제판세를 정확히 읽고 예측할 수 있는 뛰어난 전문가가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 대한민국의 잠재적 손해를 줄여야 한다. 그리고 군사력 측면에서 비대칭 전력인 대량살상이 가능한 핵무기를 북한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 안된다. 고려 당시 뛰어난 비대칭전력이었던 기병부대를 가지고있던 여진족에 대항하여 맞춤형 항거전력인 별무반을 구성했던 윤관처럼, 대한민국도 북한의 핵무기를 무효화 시킬 능력이 없다면 한국도 그 북한의 비대칭 전력에 맞먹는 군사 전력을 갖추어야 한다. 앞서 말한 전력에는 여러 방안이 있겠다. 그렇게 양측간의 균형을 잡지 못 하거나 상대의 전력을 넘어서지 못하면 언제가 됐든 국가는 쇠퇴하거나 사라지게 되어있고 그런 국가의 국민들과 후손들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 윤관 장군 영정


윤관 장군은 전쟁에서 패배도 많았고 해서 뛰어난 전쟁 전문가라기보다는 영토확장이라는 큰 판세 흐름에 발벗고 나섰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것은 후에 조선의 왕 세종에게 옛 우리 역사의 땅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갖도록 하는데 기준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세종 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최소한 고토 회복을 통한 대한민국과 국민의 번영을 꿈꿀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의 기준이 되고 경계로 삼을 만한 역사적 사실을 계속해서 찾아볼 것이다. 그 기준을 결정짓는 뛰어난 리더십을 지닌 합리적이고 대범한 영웅이 이 땅에서 나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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