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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을 승리할 수 있었던 근본적 비결

고려 초기에 있었던 여요전쟁이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 고려의 전쟁을 말합니다. 1000년 대에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거란족의 요나라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여 만리장성 넘어 있는 송나라의 지역인 연운 16주까지 삼키는 등, 거란족의 요나라가 동아시아 패자가 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요나라가 총 세 번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는데 1차 때는 서희 장군의 세치혀로 모면을 하지만 요나라의 2차 침공에는 요나라 왕인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게 됩니다.


고려의 장수 강조는 고려를 공격한 거란군에 잡혀 처형되고 고려 조정은 또다시 요에게 항복을 해야한다는 의견이 다수 정론으로 모이던 때, 고려의 강감찬 장군이 지금은 요나라 군대의 기세가 날카로우니 일단 고려왕 현종께서는 피신을 해야한다고 제안하여 개성에서 전라남도 나주까지 몽진(왕의 피신)을 하게 되죠.



▲ 강감찬 (948-1031)


강감찬은 36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과거를 장원으로 급제하지만 그 후에 고려왕 현종의 나주 피신까지 이렇다할 기록이 없습니다. 요나라의 고려 2차 침공 때 절체절명의 순간부터 강감찬의 일단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자는 진언을 시작으로 다시 강감찬이 역사서에 나오게 되죠. 하공진이라는 고려의 신하가 요나라의 성종에게 외교술을 발휘하여 일단 거란의 군대를 고려의 땅 밖으로 돌려보네 급한 불을 끄는 것에 성공합니다.



▲ 요나라 장수 소배압


하지만 하공진이 요나라 왕에게 했던 약속을 고려가 지키지 않자, 이에 요나라 왕은 소배압을 시켜 고려를 공격하게 합니다. 여기서부터 노장인 강감찬 장군의 활약이 이어지며 우리나라 3대 대첩 중 하나로 여기는 귀주 대첩이 발생하게 됩니다. 




▲ 귀주대첩


고려의 20만 병사와 요나라의 10만병사가 귀주라는 곳에서 한치의 양보 없는 격전을 펼치는데 때마침 고려의 지원군이 도착하고 바람도 남풍이 불어 바람을 등으로 받게되는 고려군과, 맞바람을 맞게되어 활쏘기가 용이하지 못하게 된 거란 병사들의 희비가 얻갈리게 되고 고려병사는 거란 병사들을 포위하여 완전 섬멸하게 됩니다. 




▲ 11세기 초


당시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 세력도입니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 당시에는 별볼일 없었던 여진이 자리잡고 있었고 송나라는 문치주의로 전쟁능력이 떨어지던 상황입니다. 거란이 크게 성장하여 넓은 영토를 먹게되고 본격적으로 송나라를 치기 전에 배후에 위치한 고려가 거란 자신들의 대업을 그르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숙제였었습니다.



▲ 거란의 3차 침입 주요 격전지


강감찬은 거란의 3차 침입 초기, 흥화진에서 요나라의 3차 침공에 수공을 써서 대승을 거뒀고, 개경에서 진척이 없는 거란 장수 소배압이 후퇴를 시작하자 귀주에서 고려와 거란의 최종 전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강감찬이 귀주대첩을 대승으로 이끌자 요나라의 힘이 그만큼 약해져 향후 약 100년이 넘게 여진족이 강성하기 전까지 동아시아에는 국가별 세력균형이 맞아떨어져 이렇다할 큰 전쟁이 없게 됩니다.




▲ 강감찬 흉상


거란족은 유목민족으로 말을 타는 습관이 어릴 때부터 길러지는 기마의 달인들입니다. 때문에 귀주의 평야에서 싸울 때, 아무리 고려가 거란 병사보다 2배 정도 많았다고 할지라도, 상당히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을 예상할 수 있었을 겁니다. 농경문화를 가진 민족은 성을 쌓고 성을 거점으로 싸우는 수성에 특화된 반면 유목민족들을 말을 타고 평야에서 빠른 기동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술에 특화되어 있죠. 수 세기 후에 거란족과 같은 유목민족인 몽골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도 그러한 맥락 위에 있습니다.




▲ 낙성대에 있는 강감찬 승마상


수인사대천명이라고 사람은 마땅이 할 일을 다 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다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강감찬은 전쟁의 신도 아니고 고대 중국 한나라의 군사 한신과 같은 천재적인 병법의 달인도 아닙니다. 문신 출신으로서 때를 기다리고 부단히 준비하여 최선을 다해 요나라의 전쟁에 준비하였을 뿐이고 이에 천명이 남풍을 불어주고 적시에 지원군이 도착하여 귀주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겁니다. 지금 시대에도, 기상청이 500~600억인 거액을 들여 슈퍼 컴퓨터를 구입해도 매번 기상예보가 틀리는데, 당시 인간이 남풍이 불 때를 알고 이를 적을 섬멸하는데 이용했다하고 하면 그것은 소설이 되는 것입니다.



▲ 진인사대천명 (수인사대천명)


36세의 늦은나이에 장원급제 하였으나 역사에 기록이 없을 정도로 지방을 돌며 때를 기다린 강감찬. 그리고 거란의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정벌하려 했을 때, 항복론을 물리치고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왕에게 건의하는 모습. 



그 후 3차 거란의 침입을 예상하여 부단히 전쟁을 준비하고 노력하여 강동 6주 지역의 강화와 청야전술등의 이해와 활용 그리고 개경의 완전한 방비, 흥화진 등에서 적의 진입로를 모두 예상하여 수공 등을 준비하는 책략 구상을 통해, 결국 이 모든 것이 귀주 대첩의 최종 승리 요소로 작용한 것입니다. 강감찬을 보고 있자면 인내의 달인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생각납니다. 대기만성형의 끝장을 보여주는 강감찬은 결국 동아시아의 중요한 전쟁이었던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고려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정세의 안정을 가져옵니다.




▲ 와신상담


강감찬은 때를 기다리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어쩌면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내용이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그 비결이 결국 고려를 구해낼 수 있었던 근본이었습니다. 또한 강감찬과 같은 인물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결과가 잘못될까 두려워 하여 일을 그르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고 때를 기다리며 일을 하나하나 완성해 나가되, 성사가 되지 않아도 그것은 천명이 허락을 하지 않은 까닭이게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데 모든 정신을 집중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한신이 기회를 기다리며 그것을 찾아 떠나는 모습


저도 많은 일을 할 때마다 안 좋은 결론을 상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들의 전형적 모습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힘들 때 웃는 자가 최후의 승자라는 말이 여기에 일맥상통하는데, 그들은 시련이 와도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모든 노력과 힘을 쏟았기에 어찌할 수 없는 요인으로 인한 시련은 웃어 넘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강감찬은 단지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아닙니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 대첩 그 이면의 사실과 원칙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것이 들리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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