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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인천상륙작전 (2) : 맥아더 장군의 허와 실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대한민국 국군은 필사적으로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고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의회를 거치지 않은 빠른 UN 결의로 50년 7월 1일 부산에 미군의 파병되고 그 후 7월 8일에는 UN군이 참전하였지만 한 번 승기를 잡은 북한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온 것이다.  8월 15일 광복절 전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에 인민군들이 낙동강까지 건너고 있었고 이 전선이 무너지면 말그대로 적화통일로 끝이기에 국군과 UN군은 배수의 진을 치며 필사적으로 싸워 더이상 북한 인민군이 전선을 넘을 수 없었고 이 전형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UN군이 전쟁에 참전한 이상, 탱크와 폭격기 군함등 군수물량면에서, 북한은 더 이상 전쟁 발발 직후의 기세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세가 되었다. 초기에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김일성은 있는 전력을 다 끌어모아 빠르게 전쟁을 종식시키려 대구 다부동에 전력의 30% 가량을 몰빵했는데 이 것이 국군과 UN군에 막혀버렸고 미국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북한군에 융단폭격을 날리던 시점이었다. 이제 전세의 흐름은 미국과 한국이 서서히 쥐게 되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빛을 발하게 된다.



맥아더 장군의 허와 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했던 이력이 있고 세계 1,2차 대전에 참전하였고 일본에게 승전한 후에 45년~46년동안 일본의 실권을 잡았다. 이 내용을 소재로 삼은 영화도 있다. 다양한 시각으로 당시 사회상을 바라보고 싶는 사람들은 토미 리 존슨이 주연한 영화를 찾아보면 되겠다.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국민들에 천황에 절대적인 충성을 하는 문화를 깨기위해 신교(신토)의 허구성을 증명하려 하였고 국국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군국주의의 원천인 자본가들을 견제할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을 묵인하는 방법으로 일본이 미국에 위협이 되는 성장 루트를 막아버린 것도 맥아더 장군이다. 전범 책임자들인 공직자를 수만명 추방시키고 자본가를 해체하며 일본 역사교육에서 천황을 찬양하는 내용을 금지시키는 등, 일본은 맥아더 장군에 의해 주리가 틀어지고 있던 시기에 6.25 한국 전쟁이 터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군수물자가 필요한 미군은 다시 일본의 자본가와 재력가를 살려주고 맥아더 장군이 취한 대일본 정책을 대부분 무력화 시키게 되고, 일본은 한국전쟁의 특수로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다시 한 번 재기하게 된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이전부터 생각해온듯 하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전세를 다시 회복하고 나아가 역전시키려면 적당한 위치에 상륙을 하여 북한 인민군의 많은 수를 포위하고 괴멸시킨다면 그 시나리오만큼 드라마틱한 전술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는지 상당수가 상륙작전의 리스크 때문에 반대를 하고 딴지를 걸어도 맥아더 장군은 끝까지 상륙을 하겠다고 밀어부쳤으며 상륙 위치를 정하는 논쟁속에서도 끝까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북한 인민군의 공세가 예상되는 인천지역을 끝까지 밀어부친다.


(좌: 제갈량 , 우: 위연)

누구나 즐겨 보고 읽는 삼국지에서 제갈량과 위연의 논쟁을 잠시 예로 들어본다. 위나라 조조의 손자인 조예를 치기로 마음먹은 제갈량은 북벌을 감행하였던 상황이다. 정사 《삼국지》의 주석으로 인용되어 쓰여진 주환의 어환》에는 위연이 제갈량에게 장안을 수비하는 하후무라는 자를 평가절하하며 자오곡이라는 지름길로 허를 쳐서 장안을 함락하고 승세를 빠르게 잡아나가길 제안하나 제갈량은 리스크가 크다며 이를 거부한다. 많은 삼국지 팬이나 중국인들은 이 위연의 계책을 제갈량이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제갈량이 사마의에 패하고 촉이 멸망하는걸 안타까워한다.


 

소설인 연의에서나 드라마 등에서도 위연을 반골의 상이라 여기며 위연의 기를 꺽기위해 제갈량이 위연의 제안을 차갑게 내치는 장면을 연출하여 제갈량의 무사안일 주의에 안타까워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고대 전쟁에서 허를 쳐서 상대 군대를 혼비백산 시켜 흩뜨리는 전술이 꽤 유효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맥아더 장군의 고집이 결국 성공했다는 점에서 위연(=맥아더) 제갈량(=트루먼)이 떠오르는데 트루먼이 맥아더 장군을 내칠 때도 삼국지의 장면과 맥락을 같이 한다.


9월 14일 늦은 저녁 함정 260척 군병력 7만 5천명이 전투기의 폭격을 지원받으며 인천 월미도를 초토화 시키며 맹공격을 하게 된다. 세계 2차세계대전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의 배경이 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상륙할 시 연합군의 사상자가 1만명이었는데, 인천상륙작전에서 상륙으로 인한 UN군의 사상자는 200명 정도였으니 성공적인 상륙이었고 북한의 병력은 전쟁으로 인해 줄어들고 있던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의 10% 정도를 서울과 인천으로 또 나누어 배치 했기 때문에 북한 인민군은 상륙을 저지할 수 없었다.


상륙 전에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미군이 상륙할 가능성이 매우 크니 도와달라는 전보를 쳤지만 스탈린은 소련사정을 이유로 거절하고 미국의 물자를 당해낼 수 없는 인민군으로서는 알면서도 당했으니 인천상륙작전이 허를 찌르는 절묘한 묘책이라고 보기보다는 대한민국진영 깊숙이 들어와있는 인민군의 허리를 쳐서 포위하여 보급로를 끊고 북한 병력을 상당수 무력화 시키는 정공법이 통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자 북한 인민군은 뒤도 안돌아보고 빠르게 후퇴를 하게되고 이런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인민군들이 서울을 틀어막으며 상륙한 UN군의 진격을 막았기에 3일동안 지체하여 겨우 서울로 입성하게 된다.


인천상륙이 전쟁을 끝내는 시발점도 아니었고 독선적이며 독단적인 맥아더 장군이 이미지 메이킹에 능했다는 이유로 인천상륙작전이 불필요한 쇼였고 위력이 강한 무기로 이루어 지는 현대전은 방어선이 한 번 무너지면 회복하기 어렵다는 내용을 들어 이미 낙동강 전선에서 전세를 뒤집기 시작한 UN군이었기에, 상륙작전을 통해 얻은 이득도 크지 않다는 평도 있으나 이는 병법에 대한 이해가 용의치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대부터 현대전까지 전쟁사에서 길게 늘어진 상대의 병력을 우회하여 치는 방법은 특별하지도 않은 보편적인 내용이고 성공시에는 상대의 전력에 큰 타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향후 전세를 끝까지 유리하게 잡고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은 결국 성공했고 맥아더 장군이 그 이후에 실패한 작전을 비판하되, 인천상륙작전은 6.25 한국전쟁에서는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해야 마땅하다.


미국과의 확전이 우려스러웠던 스탈린은 김일성의 지원요청에 난색을 표하며 시간을 끌지만, 마오쩌둥은 미국이 계속 북진하면 결국 중국과 바로 맞대면을 하게 되기 때문에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의 원리를 각성하며 10월 8일 중공군의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됨에 따라 맥아더 장군의 오판으로 기습공격에 철저히 대비하지 못해 운산전투에서 패하게 된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UN군에게 소련과 중국과의 마찰을 우려하며 38선은 돌파하되, 압록강 국경선 부근 밑으로 50Km 떨어진 곳까지만 진격을 허용하게 된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승리가 코앞인 상황에서 진격한계선에 대해 불만이 있었고 국경선까지 진격을 명하게 되는데 북한 인민군뿐이라면 맥아더 장군의 판단이 맞지만 중공군이 참전하게 되어 계획은 새판에서 다시 짜여져야 했던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빠르게 북진후 전쟁을 끝내는 상황을 선택하여 북진을 명했고, 이로 인해 UN군과 국군의 많은 사상자가 나게 된다.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중공군의 규모와 그들의 전술을 파악한 후 접금했어야 하는데 맥아더 장군은 이를 간과하고 기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리한 진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위치하고 있어 한반도에서도 가장 추운 곳에 손꼽히는데 온도는 한겨울에 -35도까지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UN군은 이러한 한국의 추위를 예상하지 못해 방한용품의 보급이 안되고있었다. 전투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나 맥아더 장군은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낼 것이라며 방한용품의 보급의 필요성을 간과해버려 병사들을 혹한속에 무기력하게 만들어 전투의지와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린 사령관이라는 점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무조건적인 호판은 생각해 봐야한다.


하지만 민간인을 포함한 대규모 철수 작전인 흥남철수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것 또한 맥아더 장군이 UN군 사령관으로서 전진이 아닌 후퇴의 미학을 보여준 점도 맥아더 장군을 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10만명의 인원을 안전하게 후방으로 이동시킨 의미는 사기진작이나 예비인적자원 보유면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선전으로 스탈린도 제공권 제압명문으로 미그기를 출격시켜 UN군의 항공기를 상당수 격파하는 전과를 올리며 맥아더 장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중공군을 제압하기 위해 핵폭탄을 포함한 모든 무기를 (세균무기 포함?) 사용하는데 고려한다고 하니 이번에는 유럽에서 영국의 수상 애들리가 반대하고 나서 트루먼은 핵폭탄 사용건은 철회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전쟁을 끝내고 승전하려면 적들의 무기가 생산되어지는 군수공장지역인 만주를 핵폭탄으로 타격 해야한다는 의견을 내세우며 트루먼과 반목하게 된다. 그리고 리지웨이라는 야전사령관이 부임하여 국지전에서 승리를 거두니 맥아더 장군은 더욱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했고, 트루먼에게 중국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전략내용을 보고하나 이 역시 묵살되어 맥아더 장군은 유럽 외교관들을 만나며 트루먼을 비난하고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다가 트루먼이 이를 알게되어 맥아더 장군은 해임되게 된다.



맥아더 장군은 결국 불명예스럽게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강직하고 불도저 같은 맥아더 장군이었지만 정치 수뇌부에게는 그저 도구에 불과했으니 권위에 도전하는 맥아더 장군을 가만 놔둘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트루먼은 부통령 자격으로 대통령이 서거하자 대통령 자리에 임명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통성에 대해 더욱 민감했을 것이다. 정치에 타협하는 점이 없는 게 여기서는 독이 된 것이다. 자신을 펼치려면 그 권한을 쥐고있는 이들을 설득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영국의 수상 애들리는 트루먼을 설득하여 핵을 못쓰게 봉인시켜버렸다. 이 것 또한 확전에 따른 영국의 손실을 감안해서 그런 것이였으니 맥아더 장군은 천상 군인으로서 부족한 면을 채워줄 현명하고 융통성있는 보좌관이 아쉬운 대목이다. 맥아더 장군이 주장했던 그대로 수십발의 핵폭탄을 중국지역에 쏟아부었으면 세계3차대전이 일어났을지 어땠을지에 대한 추측이 많고, 특히 한국전쟁은 우리 한반도 땅에서 일어났기에 우리 국민들의 관심이 더욱 쏠리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확실한 것은 당시 트루먼과 영국수상 애들리가 핵폭탄 사용을 하지 않고 한국전쟁을 휴전하여 한국과 북한의 고착화를 만드는 것은 미국과 영국을 자신들을 위해서이고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이 핵폭탄을 사용해서라도 한반도 북진통일을 이루고 중국의 장제스가 중국을 통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자신들을 위해서이다. 개 중에 무엇이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 도움이 되는지 판단하면 의외로 쉽게 답이 나올 수 있다.


1부 링크 : http://powermental.tistory.com/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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