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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원효대사 해골물 한 모금이 백성들의 갈증을 적시다.

원효대사는 600년대 사람이라 상당히 오래된 분이지만 현재까지도 어린이 프로그램부터 해서 성인 교양 매체에서도 자주 원효를 다루기 때문에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인물이다.


원효대사와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려 하는 도중에 있었던 해골물 일화를 못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해골물 하면 원효대사, 원효대사 하면 재밌고 교훈을 얻는 해골물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당시 신라시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사상가였던 원효대사는 불교의 규율을 따르지 않고 자유스럽게 생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때문에 각종 문화 콘텐츠로부터 뭔가 도력이 높은 승려가 자유롭게 고기도 먹고 술도 먹으면서 비범한 모습을 보이는 캐릭터를 접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연출의 시초에는 워낙 인지도 높은 원효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 원효 (617-686)


원효는 본명이 아니다. 본명은 '설사' (!?) 라고 하는데, 임팩트가 있어 잊혀지지 않는 본명이지만 이름의 '사'자가 생각할 사 이므로 원효가 당시 신라시대의 깊은 사고를 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설사'라는 이름이 참 어울리는 본명이라고 생각이 든다. '설'은 성씨다. '원효'는 승려에게 붙여주는 법명이고 대사는 부처나 보살을 일상적으로 부르는 말이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원효대사' 라는 명칭에서 그 입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원효대사 해골물 일화


원효대사의 해골물 사건은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사물이 달리 보일 수 있다라고 하는 교훈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 내용의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일본 승려 '묘에'가 원효와 의상의 행적을 담은 일본의 국보인 《화엄연기》라는 그림책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 유학길 에피소드에서 해골물에 대한 내용을 찾아봐도 없기 때문이다.




▲ 화엄연기 초반에 나오는 의상과 원효


위 그림은 《화엄연기》 초반 부분에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 유학길에 어느 동굴에서 취침을 하는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해골물 에피소드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 해골인데, 해골은 보이지 않고 악마나 도깨비로 보이는 괴상한 존재가 잠을 자고있는 원효와 의상을 지켜보고있다. 《화엄연기》에서 알려주는 원효대사의 스토리는, 늦은 밤 원효가 잠자리를 찾다가 아늑한 동굴을 찾아 꿀잠을 자고 다음 날에 일어나보니 무덤속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 불면증


날이 저물고 원효대사는 다시 그 무덤속에 들어가 잠을 청해야 하는데, 무덤속이라는 인식 때문에 불안하여 원효대사 꿈에서 온갖 잡귀가 나타나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늑한 동굴이라고 인식했을 때는 꿀잠(숙면)을 잤는데, 무덤속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무서운 마음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는 스토리가 원효의 해골물 스토리 정식버전이었던 것이다. 



해골물 스토리는 13세기에 나온 《화엄연기》보다 몇 백년 후에 나오게 되니, 아마 해골물 스토리는 원효의 무덤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각색하여 꾸민 것으로 예상한다. 어쨌든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나 무덤 귀신 《화엄연기》 내용이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내용을 내포하는 것은 같다.




▲ 한반도의 600년대, 끊임없는 전쟁의 시기


원효대사가 살던 7세기 즉, 600년대에는 한반도에서 너무 많은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에는 수나라와의 격전이 있었고 (영웅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수나라가 망하니 바로 당나라가 건국되어 결국 고구려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당한다. 백제 또한 의자왕 때 신라와의 전쟁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고 결국 당나라에 의해 백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 600년대에는 1년에 한 번 꼴로 참혹한 전쟁이 일어났다


또한 7세기에는 각종 국가 부흥운동으로 수많은 전투가 있었으며 대조영이 당나라의 장군과 교전 후 승리하여 발해를 세우는 때도 7세기이다. 신라 또한 고구려와 백제와의 거듭되는 전쟁이 있었고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 벌어진 독립 전쟁이 있었는데, 이 모든 전쟁이 600년대에 일어난 일이다. 때문에 역사를 보는 현대인 입장에선 흥미진진한 7세기일 수 있지만, 당시 살아가던 선량한 백성들에게는 지옥의 시대와 다름 없었을 터이다.




▲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는 7세기 한반도의 백성들


600년대를 살아가던 백성들에게는 마음의 안정을 취할 매개체가 절실하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 때 자기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불교계의 규율을 어기며 생활하던 원효대사가 급격히 백성들의 민심을 아우르게 되는데, 원래  당대 불교란 당시 고대시대 백성들에게는 고등 종교로서 모든 경전이 한문으로 써있고 그 내용 또한 심오한 이론으로 구성되어 접근조차 할 수가 없던 상황이었다.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의 심적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당시 상류층이자 지식인이었던 원효대사가 불교계에서 정한 기준을 무시하더니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이 있는 마을로 내려가 백성들과 소통하며 불교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누구나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내세에서 극락으로 갈 수 있다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 불교의 계율을 파한 파계승


나무아미타불이란 백성들이 입으로 나무아미타불만 말하면 아미타 부처님에게 귀의(기대어)하여 구제받게 된다는 주문과도 같은 말이었다. 이러한 원효대사의 백성들에 대한 방침은 근본적으로 백성의 우환을 치료하진 못했겠지만, 당시 지옥같던 시대상황에서 아마 플라세보 효과(가짜약을 먹었지만 진짜약을 먹은 것과 같은 신체반응 효용)로 백성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당시 신라는 6두품 계급이라는 계급간 철의 장벽이 존재하던 신분사회였는데, 최고 상류층인 승려 원효대사가 직접 백성들에게 찾아가 노래부르고 춤추며 자신을 낮추니 백성들로서는 어리둥절 하면서도 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에는 원효의 '무애'사상을 볼 수 있는데, 애는 한자로 碍(거리낄 애) 이 문자를 쓴다. 거리낌이 없이 마음 껏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원효의 개성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 대승기신론소 내용


원효는 어떤 생각으로 불교의 계율을 져버리는 파계를 하고 백성들에게 불교를 쉽게 풀어 줘서 당시 지옥같던 시대를 살던 백성들의 마음에 위안을 줄 수 있었을까. 원효의 유명한 책인 《대승기신론소》, 《십문화쟁론》, 《금강삼매경론》 을 보면, 원효가 누구인지 자세히 알 수 있다. 여려울 거 하나 없다.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은 원 책을 읽고 풀어서 해석하고 그 내용에 주석을 단 것인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원효의 일심(一心)사상을 가감없이 드러낸 저서들이라고 보면 된다. 



일심사상은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되며 하나는 모든것으로 파생된다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원효의 해골물 에피소드가 바로 일심사싱에 근거한다. 마음가짐을 중시하며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한다는 말이다. 《십문화쟁론》에서는 '화쟁'이 사건진행의 핵심 원리라고 보는데, 다른 사람들과의 분쟁등을 아예 끊어버리는 '무쟁'과는 좀 다른 의미이며 서양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과도 살짝 다르니 비교해서 보면 이해가 쉽다.




▲ 헤겔 (1770-1831)


헤겔이 말한 변증법은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 (정) 이 자신을 부정하는 어떤 사건을 겪어서 (반) 그 영향으로 성장장하게되는 변화된 자신 (합) 이 된다는, 변화과정의 정반합 이론을 설명했는데, 원효 대사의 '화쟁'은 '정'과 '반'이 결국에는 다를 게 없는 하나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라시대의 계급도, 선민사상도 모든 것이 원효대사의 철학 앞에는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원효 말대로 하면 만민 백성은 평등하며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부처앞에서 찾을 수 있었다. 원효의 철학과 사상은 불교라는 종교의 바운더리 내에서 이루어 진 것이지만, 결국 현대 시대의 민주주의 이념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민주주의는 모든이를 의미한다


지금으로 부터 1300년 전 즈음에 살던 원효의 사상은 당시 고대 시대를 너무 앞서가던 사상이었다. 불교계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특이한 괴짜로 취급받던 원효대사는 이제 우리에게 종교인이자 사상가로, 철학가이자 집필가로,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습득한 학자이자 선구자로 인식되고있다. 

고정관념을 깨버린 원효대사가 가진 생각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얄팍한 수위에서 일어나는 일들만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 파계승 원효의 기이한 모습만 보고 그를 평가 절하하며 배척하던 상황이 현대 우리 대한민국의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틀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다'라는 것을 원효 대사를 보며 다시금 상기할 수 있고 우리가 남들을 어떤 선입견을 통한 잘못된 시선으로 보고있는지, 다시금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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