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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고려 광종이 일타쌍피의 달인인 이유

나는 오래전부터 왕권이 약한 시절에 왕이 된 사람들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특히 지방 호족들의 사병을 혁파하는 과정이 몹시 궁금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당시에 명확히 알려주는 책도 자세히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인데, 이제와서 고려 왕 광종의 삶과 나의 경험들과 지식들을 가미해서 미루어 판단해보니 그것은 목숨을 건 용기와 뛰어난 지략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상황과 시대가 허락해주는 운이 개혁가나 혁명가에게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광종은 그런 운은 물론이고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을 부단히 노력하여 확장했기 때문에 원하는 걸 손에 넣은 인물이다. 매우 흥미로운 인물 광종이 어떻게 일거양득, 일타이피의 달인이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 고려 왕 광종 (925-975, KBS사극 제국의 아침 中)


태조 왕건이 나라를 창건한 그 고려 초기에는 나라가 호족연합국가의 성격을 띠었다. 한마디로 각 지역의 실세들이 각자의 뜻이 합치되는 조직체를 구성하여 왕건을 조직의 구심점으로 후삼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룬 것이니 여전히 지역실세들의 입김이 셌다. 왕건도 호족 중에 하나였으니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런 왕건은 고려를 세운 후 각 호족들을 어르고 달래며 자신의 왕위를 도모하였는데, 완전히 호족들을 컨트롤 할 수 없었고 왕건은 호족 그들만의 독자세력을 인정해야했다. 광종의 형제이자 선대왕인 혜종과 정종 또한 각각 지방 호족에 의탁해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고 정무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광종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피바람이 부는 혁신적 개혁정치를 통해 고려 왕의 권위를 높이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세력은 개국공신이든 피를 나눈 왕실 사람이든 가차없이 처단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그런 살인마적인 모습의 광종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보여지는 상황에서 이루어내는지 그 과정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광종을 통해서 현재 내가 얻을 것이 무엇인지 최대한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이 포스팅의 목적이니 여러분들도 나와함께 그러한 관점으로 봐보도록 하자.




▲ 당태종 이세민 (599-646)


고려 왕 정종이 병사하자 광종이 정종을 이어 고려 왕에 오른다. 초기에는 호족들의 힘을 인정하며 왕이지만 자신을 비교적 낮추는 모습을 보이는데, 사천대의 어느 승려가 광종에게 덕을 쌓으라고 청한 일을 계기로 광종은 제왕학의 비기들이 적혀있다고 평가받는 《정관정요》를 탐독하게 된다. 


당 태종 이세민 때의 연호가 '정관'이고 정요는 '정'치의 중'요'한 것들을 의미한다. 당 태종이 신하들과 문답형식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한 내용들이 적혀있는데, 백성들에게 세금 등 의무를 지우는 방법, 임금 자신이 쌓아야 할 덕, 신하의 간언, 학문과 문화 그리고 형벌 등을 논하는 기록이 《정관정요》다.




▲ 《정관정요》 전 10권 40편


당 태종은 신하들과 정치 또는 군사에 대해서 심도 깊게 의논하는 것을 즐겨한 듯 하다. 나는 당태종 '이세민'과 당나라 신하 '이정'이 병법에 관하여 문답형식으로 열의를 갖고 대화한 기록인 《이위공문대》를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확실히 《손자병법》이나 《오자병법》같은 딱딱한 문장의 난해한 어법을 구사하는 책보다 《이위공문대》에서는 마치 드라마를 보는 근거리에서 보는 듯한 현실감이 느껴졌는데, 아마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에 대한 당태종의 생각과 이정과의 논의가 고스란히 나오기 때문에 더더욱 흥미로웠던 거 같다.


지금 당나라 때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과 규모로 현대의 군대가 움직이는 시대에 살고있는 현대인인 나 조차 당태종의 병법에 대한 식견에 놀랐었는데, 그 시대에 살던 당시의 광종은 아마 《정관정요》를 보고 그 내용을 토씨 하나 안 놓치고 기억하고 그것을 행하리라 단단히 마음먹었을 듯 하다.




▲ 불교 부흥에 힘쓰는 광종


광종은 《정관정요》를 읽으며 머릿속에만 지식을 남겨놓는 백면서생타입이 아니다. 곧바로 자신이 개혁할 밑바탕을 깔아놓는 방침을 행하는데, 광종 자신이 꿈꾸는 개혁의 원천은 민심에 있다고 결론을 내리며 민심을 잡으려 고심한다.


그리고 그 방안으로 불교를 진흥시켜 불교라는 종교로 그물을 던져 놓으면 백성들은 하나 둘 그물에 걸리고 광종 자신은 그물의 꼭지부분만 들어올리면 민심이라는 대어를 낚아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광종이 왕위에 있을 동안 끊임없이 불교를 부흥시키고 이에 끝내지 않고 교단을 통합시키는 시도로 백성들의 민심을 가리지 않고 잡으려 한다.




▲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광종은 국사와 왕사제도인 이사제도를 두고 화엄종의 균여를 통해 교종을 통합시키려 하며 법안종의 혜거를 통해 선종을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또한 화엄종 본찰인 귀법사를 창건하여 분열된 종파를 수습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며 승과제도도 실시하는데, 이 모든 게 불교라는 통합 그물에 걸린 백성의 민심을 광종 자신이 그물 주인이 되어 민심을 건져올리려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백성들의 민심이 없으면 호족에 대항하여 왕권을 강화하기는 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치를 광종은 깨달은 것이다. 백성의 민심을 얻게 되면 비록 개혁의 단계에서 잠시 실패하더라도 다시 권토중래하여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근본적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 후주사람 쌍기


광종은 《정관정요》로 왕의 정신을 배우면서 자신의 과업을 위해 불교를 통한 민심잡기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다. 다만 광종 주위에는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이렇다 할 측근 인물이 없었는데, 당시 중국의 혼란스러운 5대 10국의 상황에서 후주의 신하인 쌍기가 후주의 왕을 도와 개혁에 공을 세우는 것을 보고 광종은 그 외국인 쌍기를 스카웃하기로 한다.


유비가 제갈량을 얻고 난 후에 중부지역인 '형주'와 서쪽 땅인 '익주'지역을 얻어 한중왕에 오르듯, 광종은 쌍기를 얻고나서 하나 둘 자신의 반대세력인 호족들을 누르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쌍기가 내는 계책은 전부 하나의 거사로 최소한 두개의 득을 보는 일거양득의 수인데 이런 계책들은 절묘하게 상호작용하여 광종의 입지를 다져준다.




▲ 광종이 시행한 노비안검법


고려로 귀화한 쌍기는 광종에게 우선 각 지방의 실세인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그 방법으로 후삼국 통일전쟁 때, 원래는 양민 이상의 계급이었지만 전쟁포로나 각종 경제적 문제 등으로 호족의 노예가 된 이들을 해방시켜 다시금 원래 신분을 되찾게 만들라는 묘책을 낸 것으로 보인다.


956년에 쌍기가 공식적으로 광종 사람이 되자마자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공표한다. 당시 노예는 곧 호족들의 땅을 일구는 경제력의 지표이자 유사시 군대를 구성하는 사병이 되므로 호족의 사적 군사력의 근본이었다. 광종이 이런 호족의 노예들을 해방시켜줌으로써 호족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줄어들어 세가 약해지고, 세금을 내는 양민의 수가 늘고(노예는 국가에 세금의무가 없다) 국가병력을 확충할 수 있으며(노예는 국가에 징병되지 않는다) 민심은 광종을 향하게 되니, 호족들의 힘은 줆과 동시에 광종의 힘은 오히려 강해지는 것이다.




▲ 노비안검법은 호족의 힘을 빼는 근본책


하지만 호족들도 광종이 왜 노비를 해방시켜 자신들의 힘을 빼려하는지 알고있었기 때문에 민심을 호족들이 잡고있었거나 호족들이 여론을 움직일 힘이 광종보다 컸다면 '노비안검법'으로 오히려 광종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광종은 애초에 백성들의 민심을 불교를 통해서 어떻게든 자신쪽으로 가져오도록 물밑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 송나라 과거시험


쌍기는 후주에서 과거를 주관하는 직책에 있던 인물이다. 그런 쌍기가 광종에게 고려에도 과거시험제도를 도입하여 새로이 신진관료를 뽑아 광종이 쓸 수 있도록 하게 건의를 하고 광종은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958년부터 고려에서 과거시험을 실시하게 한다.



고려를 만드는데 공을 세운 공신들인 호족들은 무(武)인세력이었다. 때문에 문(文)적 능력으로 선발하는 과거시험에서 합격하여 고려 관직에 진출하는 일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려워지게 되고 과거에 합격한 신진관료세력들은 호족세력 자제들처럼 딱히 가문이 받쳐주거나 큰 힘이 되는 배경이 없기에 오로지 자신을 선발해서 관료에 올려준 고려 왕 광종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다.




▲ 당시 5대 10국 시절의 후주


일반적으로 정규 역사교육과정에서 광종하면 칭제건원을 하여 밖으로는 왕 안으로는 황제국을 선포했고 독자적인 연호인 '광덕'과 '준풍'을 사용한 대외적으로 완전히 떳떳한 자주국의 국왕임을 강조하는데, 실상은 '광덕(949-951)'과 '준풍(960-963)'을 잠시동안 사용한 것이고 그 사이에는 후주의 연호를 썼다.


즉 광종은 실리를 따져 엎드릴 땐 납작 엎드린 것인데, 후주에 조공책봉관계를 맺어 대외관계의 안정을 꾀하고 내부적인 개혁을 외부의 간섭없이 제대로 시행하려 한 것이다. 963년 이후에는 송나라의 연호를 쓴다. 송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모습을 보이자 거기서 이리저리 치이는 인재들을 흡수하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것도 광종은 잊지 않고 시행한다.




▲ 중국 고대시대 반대파 숙청


광종은 왕위에 오른 후 7년동안 호족들의 비위를 맞춰주며 때를 기다렸다. 《정관정요》를 숙독하여 왕의 정신을 배우고 민심을 얻기위해 불교를 장악하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그리고 쌍기라는 인재를 찾아내서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과거제도' 시행으로 자신의 편이 될 사람들을 조정으로 끌어들여 광종 자신의 세력을 키운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중원에 '후주'와 '송'같은 강대국이 등장하면 납작 엎드려 실리를 추구하여 내적으로 자신의 개혁을 추진할 환경을 만들어 놓는다. 이런 작업들을 해놓은 광종은 960년부터 자신을 거스르는 반대세력에게 피의 숙청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 상대가 내려가면 그 반작용으로 자신은 오르게 되는 시소게임


광종이 보여준 전략들은 상대를 누르는 그 반작용으로 자신의 입지는 자연이 강화되는 일거양득, 일타이피, 일타쌍피, 양수겸장의 고난도 계책을 매번 내어놓고 성공시킨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에는 광종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통찰력과 인내심 그리고 쌍기와 같은 능력있는 사람들의 중요성을 우선시하는 인재중시 관점의 보유에 있겠다.


그리고 신중히 때를 기다리며 기회가 왔을 때 자신이 준비한 노력을 믿고 과감히 일을 진행시키는 능력 또한 눈여겨 봐야할 대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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