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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중종에게 죽임을 당한 결정적 이유

나는 조광조를 보면 자아도취 또는 자기도취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대쪽같은 굳은 심성에 정의롭고 불의와 타협하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의 개혁가로 알려져있지만 결국 따지고보면 자신이 정한 룰에 벗어나는 이들을 소인들이라 폄하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조광조의 모습에서 무엇인가 불합리한 조선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여지게 된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정의롭고 실력있는 자가 주도적인 개혁과 혁신작업으로 대한민국에 고착화된 낡은 폐습들을 고치거나 없애 나가며 부패한 이들을 처리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여 국민들을 새 시대에 동참시키는 일이 시급한 문제라는 것에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개혁가 자신이나 그 개혁가에 동조하는 국민들이나, 조선시대에 살았던 조광조의 개혁정치에서 참고할 만한 사항이 많은데 여기서는 조광조가 놓치거나 오판한 부분이 무엇인지, 어떠한 부분이 조광조의 죽음을 불러왔으며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한다.



▲ 조광조 (1482-1520, 국오 정홍래가 그린 영정 1750)


김굉필이 무오사화로 유배되자 그 유배지에서 김굉필과 만나게 된 어린 시절의 조광조는, 김굉필과 사제의 연을 맺고 김굉필의 가치를 그대로 전수받게 되어 조광조는 훗날 사림파의 영수가 되게된다. 유교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조광조 하면 개혁정치의 대명사같은 인물로 여겨지는데 개혁이라는 증기기관열차가 달려가는 과정에서 뿜어내는 뜨거운 증기가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광조 개혁작업은 거침없었으며 거기에는 조선의 왕 중종의 조광조에대한 무한 신뢰가 바탕이 되고있었다.



▲ 조광조 친필


당시 중종(1488-1544)은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같은 중종반정의 공신세력에 의해 연산군이 내쳐지고 그 왕의 자리에 대신 옹립된 조선의 11대 왕이었는데 중종반정의 공신세력의 힘이 워낙 컸기에 중종은 기를 못 펴고 신하들의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자신의 생존과 왕권확립에 관심이 컸던 중종으로서 조광조를 파격승진을 시키며 신하들끼리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중종의 왕비였지만 연산군과 관계가 되어있다는 이유로 폐비가 된 폐비 신씨를 복위해야한다는 박상과 김정이 중종에게 상소를 올리자 반대세력은 박상과 김정을 벌하자는 주장을 하는데, 당시 대간에서 박상과 김정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왕이 그것을 윤허하였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조광조가 역으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모든 대간들을 전부 파직하든가 자신을 짜르라고 상소를 올린다.


중종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결국 조광조 말대로 하는데, 이것은 중종이 조광조를 세력이 큰 공신과 대신들을 견제할 인물로 낙점하여 한쪽 신하 세력이 커지지 않게 하기위한 판단이었다.



▲ 조광조는 당시 미남으로 유명했다는 설


조광조는 빠른 시간 내에 파격승진을 거듭하는데, 거기서 사람파들을 천거하는 '현량과'를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것을 성공하고 미신타파라는 명분으로 소격서를 폐지 하고 더불어 유교를 유일한 가치관으로 자리잡게하기 위해 승과도 폐지한다. 여씨 향약을 지방에 보급하여 중앙집권국가 및 사림파의 원동력을 구축하고 경연을 강화하여 왕에게 도학정치를 꾸준히 추구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조광조의 이런 개혁정치들은 많은 이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적을 만들었는데, 중종 또한 조광조의 사림 세력이 커지자 조광조에 대한 총애를 거두게 되는 것의 결정적인 사건이 위훈삭제이다.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다는 이들의 규모가 허위로 부풀려져 공신에 책봉되는 경우가 많아지자 조광조는 공신으로 책봉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짜 공신이며 그들을 공신 명단에서 삭제해야된다고 주장하여 결국 위훈삭제를 해낸다. 



▲ 조광조의 묘


홍경주, 심경 등의 공신탈락 세력(76명)이 크게 반발하였다. 홍경주와 심경이 조광조를 제거하려 궁중인에게 '주초위왕' 이라는 글자가 나뭇잎에 나타나도록 잎에 꿀을 발라 벌레가 그 꿀이 발라진 부분을 먹게하고 이를 조광조가 역모의 의중이 있다는 증거로 중종에게 들이밀자 끝내 중종이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사사시키게 하니 조광조는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음에 이른다.



▲ 走(주) 글자와 肖(초) 글자가 합쳐지면 趙(조)가 된다. 조씨(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 (주초위왕)


기묘(1519)년에 일어난 조광조 유배 및 조광조 세력의 실각이 기묘사화이며 유배된 지 2달 후인 1520년 1월에 사약을 마시고 죽게되는 조광조는 상당히 급진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적을 많이 만들었었다. 급진 사림파와는 다른 온건 사림으로 여겨지는 남곤도 조광조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게 되는 조광조의 반대세력이 되었는데 결국 조광조는 중종을 잘 못 판단하고 있었고 왕으로부터 나오는 힘을 기반삼아 많은 적이 생성되더라도 조광조 자신이 이상으로 여기는 개혁정치를 단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애초에 신하들의 필요해 의해 옹립된 왕이었고 그런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중종 자신의 생존과 왕권과 권위 확립을 무엇보다 가장 중요시하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신하들끼리 힘을 소비하며 다시는 다른 쿠데타 또는 반정 등 변란으로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지 않기를 원했던 중종은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조광조를 키웠던 것인데, 조광조 세력이 커지게 되어 중종의 사냥개로서 주인을 위협할 덩치가 되자 중종은 그 사냥개를 바로 토사구팽 시켰던 것이다.


조광조의 유교 정신과 도학정치는 당시에 조선의 상황과 왕의 입장에서 상당히 뜬구름 잡는 이상적인 내용이었다. 순수했고 열정적이었던 조광조는 사약을 마시며 죽는 순간 까지 절명시를 지어 군신관계의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인다.


▲ 조광조의 절명시 (絶命時)


결국 조광조는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아주 위태로운 권력위에서 개혁의 칼을 휘두른 것인데, 실체적 힘이 없지만 그 장황한 껍데기의 규모만 알고 그 내면의 근본적 원리는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권력의 핵심인 왕의 심정과 왕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그 힘 위에서 개혁을 추진 하려 하니, 삐끗하여 잘못되면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까지 목이 달아나게 되는 것이다.


힘이 없는 개혁은 무장되지 않은 병사들을 오로지 확성기 하나로 전쟁터에서 분발시키는 지휘의 외침과 같다. 조광조 개혁의 급진성이 문제가 된다기 보다 개혁의 첫 단추로 중종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고 그것을 인지하는 것 부터, 개혁의 전략들을 구성하여 실행해야 했는데, 왕의 속마음이 도학정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왕권확립에 있었음을 정확히 알았다면 사방에 적을 만드는 만드는 개혁실패의 단초와 다름없는 자살골은 넣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퇴계 이황은 이런 조광조 보고 학력이 부족하다는 워딩을 사용하며 때와 힘을 헤아려야 됐어야 한다고 아쉬워한다. 비록 조광조는 실패하고 죽지만 그 자질은 훌륭하다고 평가하는데, 조광조의 순수성 측면에서 나의 조광조에 대한 의견도 이황과 다를 바 없고 그 부분에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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