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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조선 왕 경종 : 경종이 끝내 영조를 죽이지 않은 이유

재위기간이 가장 긴 조선 19대 왕인 숙종 (45년 10개월) 과 조선 21대 왕인 영조 (51년 7개월) 사이에서 약 4년간 조선의 20대 왕을 역임했던 경종은 특별히 우리의 기억속에 확실한 존재감으로 남아있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떠한 인물을 강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특별한 사건이나 치적의 존재가 그다지 없어 보이고 워낙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과 아버지 숙종 그리고 이복동생인 연잉군 (영조) 이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아 경종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어려운 사정 때문이기도 한 듯 보입니다.


당시 노론과 소론의 위정자 정쟁세력이 치열하게 권력다툼을 하고있었고 강세를 보이던 노론세력에 의해 폐세자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경종이 세자시절부터 스스로의 언행을 극도로 조심하게 행동하는 처세가 몸에 배게 되는 원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전임, 후임 왕이 조선에서 가장 왕으로서 재위 기간이 길었던 두 명이었는데 경종은 세자 신분으로 무려 약 30년 동안을 지내는 인물이고 왕위에 올라서는 4년, 그것도 병세로 연잉군 (영조)이 2년동안 대리청정을 하니 왕으로서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낼 시간이 매우 촉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치적이 없다고 평가받는 경종이 우리에게 인간이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볼 수 있는 큰 의미를 하나 던져주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파악해보겠습니다.



▲ 경종 (1688-1724, 본명 : 이윤)


조선시대 최고의 왕권을 자랑했던 숙종을 아버지로 둔 경종은, 장희빈이 숙종의 아들인 경종을 낳자 경종은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사랑받기도 했지만, 갑자사화로 결국 남인 세력이었던 어머니인 장희빈이 숙종의 명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의 어머니의 정적인 노론세력이었던 인현왕후의 아들로 입적하여 친모인 장희빈을 거론하지도 못하고 인현왕후에게 효를 다 하며 지내게 됩니다.



경종이 몸이 약해서 병치레를 많이 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지만, 후사가 없을 정도로 몸이 약했는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어서 성기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고가기도 합니다. 경종이 왕세자 때 자신으 배우자인 단의왕후를 잃고나서, 후에 10대 후반의 젊은 선의왕후를 왕비로 맞았지만 결국 경종은 아들이나 딸을 얻지 못합니다.



▲ 영조 (1724-1776, 연잉군, 본명 : 이금)


경종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얼마 안되어 노론 세력의 압박으로 숙빈 최씨의 아들인 이복동생 연잉군 (영조)을 세제로 삼고 2년 후에는 연잉군 (영조) 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경종이 마냥 유약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경종의 독살시도가 있었다는 상소가 들어오니 경종은 진노하여 관련자들을 처단하였고, 경종 자신의 어미니의 죽음이 응당 정당했다는 성균관 장인 윤지술의 발언과 그것을 옹호한 민진원의 죄를 물어 신임옥사라고 불리우는 숙청작업을 단행하였습니다. 이로인해 노론세력이 타격이 컸으며 많은 이들이 죽고 유배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 연잉군 (영조) 이 경종에게 올린 게장과 생감


경종은 자신의 신변을 위협하는 역모의 혐의가 있는 자들은 처단하면서도 그 역모 의심세력인 노론의 구심점이 되고있는 연잉군 (영조) 에게 죄를 덮어씌우거나 질책하지는 않습니다. 경종이 병을 앓다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되어 죽을 때도 몇가지 의혹이 있는데, 당시 왕세제였던 연잉군 (영조)이 한의학에서 함께 먹으면 안 좋다고 여기던 게장과 생감을 의원 등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기어이 경종에게 진상 올리게 됩니다.




게장과 생감을 먹고나서 몸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진 경종이 다시 연잉군(영조)이 올린 인삼을 세차례 먹고 사망하는 상황을 볼 때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이 경종의 죽음에 영조 (연잉군)가 배후에 있을 거라는 혹은 독살설 추측을 하게 되는데, 그래도 경종의 연잉군 (영조)에 대한 신임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경종의 확실한 사망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 원소의 아들들, 원상 원희 원담


조선시대 뿐만이 아니라 그 전의 역사를 지켜봐도 권력은 아버지와도 나누지 못하는 치명적인 중독체로 보이는 사례가 많은 상황에서 동복형제도 아닌 이복형제인 연잉군(영조)을 경종이 끝까지 지켜주는 데는 뭔가 있는 듯 보입니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유비 관우 장비가 나오는 삼국지의 내용 중, 중국 200년대 삼국시대에서 일어난 유명한 전투인 조조와 원소의 관도대전에서 세력규모가 조조를 압도한 원소가 어떤 이유인지 결국 조조에게 패하게 됩니다. 원소의 결정적 패배 이유는 원소의 아들들인 원상과 원희 원담이 서로 반목하여 힘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조조의 이간계에 놀아나 각개격파 당하기 때문입니다.



▲ 고구려의 멸망


굳이 고대 중국까지 가서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우리 역사를 봐도,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하는 원인이 당시 고구려 집권자였던 연개소문의 권력과 병력을 나누어 가지고있던 연개소문 아들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형제들이 당나라의 이간책에 넘어가 고구려를 위해 싸워야할 연개소문 아들들 끼리 서로 반목하여 병력이 분산되고 지휘체계가 망가지게 되어,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에도 오랜기간 맞서 싸워왔던 그 강성한 고구려가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 후백제 왕 견훤(우)과 아들 신검(좌), KBS 사극 태조왕건 中


고려의 태조 왕건을 몇 번이고 패배시킨 강력한 세력인 후백제가 멸망한 결정적인 이유도, 후백제의 왕 견훤의 아들 신검이 견훤에게 맞서게 되고 이를 괘씸하게 여긴 견훤이 왕건의 설득에 넘어가, 왕건의 고려에 투항하여 후백제의 세력은 조각나고 힘을 결집할 수 없었던 후백제는 결국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종은 알량한 자신의 왕권보다는 자신의 가문인 전주 이씨가 소유한 왕조국가인 조선을 계속해서 유지시키는 큰 그림을 그렸기에 연잉군(영조)를 죽이지 않고 끝내 조선의 왕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실 권력이나 재력을 갖고 사람들을 부리는 이들이 이런 행동을 보이기 쉽지 않습니다.



▲ 절대권력의 상징 - 진 시황 릉 안의 병마용


지금 우리가 재벌들이나 권력을 쥐고있는 사회 리더들의 형제 자매들 또는 직접 연관된 가족 친척들이 서로를 잔인하게 대하며 송사 등으로 싸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권력을 접한 이들은 그 권력이 주는 가치 외에 정말 중요한 내용들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간과해버리는 패턴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종은 자신의 몸이 아프고 후사가 없자 마지막 조선 적통인 연잉군(영조)을 지켜냅니다. 당시에는 전주 이씨 가문을 지키는 것이 곧 나라를 지키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의를 위해 자신의 분노를 참고 의심을 애써 거둬내어 인내하는데, 어찌보면 경종 자신을 희생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 희생과 양보 그리고 협력


이후 경종의 후임 왕인 영조와 정조시대에, 어쨌든 그보다 전 시대에 있었던 무분별한 당쟁으로 무의미하게 국력이 소모되는 시기라는 것과 비교해서, 영조와 정조의 조선사회는 그 전보다 살짝 부흥의 시대로 가게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평생을 인내와 신중함으로 숨죽이며 살아간 경종은, 결국 조선의 왕이 되어 권력을 잡았음에도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는 일보다는 더 큰 대의를 위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몸은 허약했지만 대인배의 면모를 볼 수 있었던 경종을 평가할 때, 다른 조선 왕들보다 경시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내용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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