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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영조: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의 탕평책이 허울 뿐인 이유

흔히 대한민국 역사에서 근세에 해당되었던 부흥기를 꼽아보라면, 조선 후기였던 18세기에 '영조'와 '정조'가 조선 왕으로 재임했던 시기를 꼽습니다.


그만큼 숙종 때부터 시작되었던, 당파가 가지는 기능의 변질과 붕당 싸움의 폐해로 인해 결국 민생을 살펴야하는 조정의 역할이 변질되어, 오로지 정당의 이해관계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고 당쟁에서 승리하여 자신이 속한 당파의 몸집을 키우고 세력을 내세워 집권하려는 욕망 뿐이었던 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영조 때부터 시도한 탕평책이 주요했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탕평(蕩平)이라는 것은 쓸어버리고 고르게 한다라는 뜻인데, 영조가 당쟁의 폐단을 없애고 각 당파에서 골고루 인재를 등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영조의 정책이었던 탕평책이 지금 우리 현대사회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자신의 아버지인 영조에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던 사도세자의 사례도 참고하여 알아보도록 해보죠.



▲ 영조 (1694-1776, 본명: 이금) 어진


영조는 조선시대 역대 국왕 중에서 가장 재위기간 (약 52년) 이 길고, 가장 오래 살았던 (82년), 장수한 왕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역대 왕들을 보면 오래 살고 재위기간이 길면 길 수록 그 왕이 이룬 업적들이 많기 마련인데, 영조 또한 오래 살았고 오랜기간 조선 왕으로 재위한 만큼 꽤 많은 대민정책과 서적 편찬 등을 추구하여 조선 후기 부흥의 서막을 알리는 인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 영조의 연잉군 시절 초상


영조는 자신의 이복 형이자 선대 왕이었던 경종의 죽음에 연관되어있다는 음모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입장이었습니다. 경종 독살설이 그것인데, 영조 왕의 재임시절, 영조가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와 김춘택이라는 사람과의 자식이 아니냐는 의혹을 전면으로 내세워 이인좌의 난(1728)일어나기도 합니다. 결국 이인좌 등의 반란군은 관군에 의해 진압되지만 영조의 정통성 문제와 이복 형인 경종의 사망에 영조가 연루된 의혹은 계속해서 영조 반대세력의 결집 명분이 되곤합니다. 대표적으로 '나주 괘서 사건'이라 불리는 소론파의 윤지의 모역사건을 들 수 있고, 영조 재임기간에 수많은 괘서와 벽서사건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게 되기도 합니다. 전에 경종과 영조에 관한 포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밑에 바로가기를 달아놓을 테니 참고하실 분들은 바로가기를 누르셔서 참고하시면 됩니다.


조선 왕 경종 : 경종이 끝내 영조를 죽이지 않은 이유 <---- 바로가기



▲ 영조의 명으로 성균관 입구에 건립된 탕평비(1742)


영조 재임 초반에는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경종 시절부터 노론은 연잉군 (영조) 를 밀고 있었고, 노론에 반대하는 당파인 소론은 경종의 왕권 강화를 관철시켜 각자 자신들의 당파 세력을 키우기 위한 투자를 하고있던 셈입니다. 노론은 경종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연잉군 (영조)를 세제로 삼아 왕실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기회로 여긴 목호룡 (남인) 이 고변을 하게되고 김일경 (소론 강경파) 이 경종에게 상소를 올려 경종 왕을 능멸한 죄로 노론의 4 대신인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김창집 등을 처형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신임사화 1721-1722).



▲ 영조 대에 편찬된 《속대전》


경종이 죽고 연잉군 (영조)이 조선의 21대 왕이 되자 영조를 밀던 노론이 힘을 얻어, 과거 신임사화의 책임을 소론들에게 묻게되고 김일경과 목호룡 등이 처형당하게 됩니다. 영조는 이렇게 소론 준론파(강경파)의 수장을 제거한 뒤 민진원, 정호, 홍치중, 김재로 등의 노론들을 대거 등용하는데 이들은 신임사화로 처형당한 이이명 등 4대신을 복권시키는데 성공하게되고 기세를 몰아 끊임없이 영조에게 노론의 정적인 소론을 모두 죽여야 된다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 영조 때 여러 당파가 잘 협조하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궁중음식 탕평채


영조는 일정 선까지 소론을 처벌하고 노론과 반대 세력인 소론의 균형을 견지시켜 서로 견제토록 만들고 어느 한 쪽의 힘이 커지지 않게 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강했기에 탕평책이라는 명분으로 노론의 주장인 소론을 일망타진해야 된다는 의견을 꺾고 오히려 노론파를 대거 파면시키고 소론이었던 이광좌를 영의정에 역시 소론이었던 좌태억을 좌의정에 제수시켜버립니다. 이를 정미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정미환국(1727)이라고 부릅니다.



▲ 오명항 (1673-1728), 이인좌의 난 제압


전부터 반역을 준비하던 이인좌 등의 남인과 소론 준론파(강경)들이, 정미환국으로 인하여 소론 온건파(완론)가 등용되어 반역의 명분이 약해진 상황이었지만, 이인좌는 계획대로 반역을 밀어부쳐 충청도에서는 이인좌(남인), 경상도에서는 정희량(남인), 전라도에는 심유현(소론)과 박필현(소론), 평안도에서는 박필현을 필두로 사방에서 서울을 협공하기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명항이라는 소론 완론(온건)파 문신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앞장서자, 같은 소론파에 의해 진압당하는 상황에서 이인좌 등의 반란 명분이 상당히 약해지게 되고 정희량 등도 해당 지역에서 진압 당하자 결국 이인좌의 난은 실패하게 됩니다.



▲ 영조 가계도


영조가 각 당파의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겠다는 것은 당쟁으로 인해 정사업무에 폐가 되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보다는 어느 한 당파세력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고 영조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영조의 말을 잘 듣는 '옳습니다' 또는 '예스맨'들을 등용하겠다는 속뜻이 있습니다. 후에 등용했던 소론들을 다시 대부분 실각시키고 노론에 힘을 실어줬다가 영조 후반기에는 이들이 영조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간언 등을 자주 하자, 말 잘 듣는 척신세력이었던 홍봉한 등을 등용하게되고 이들은 영조 말년까지 실세로 군림하게 됩니다.



▲ 《한중록》 (혜경궁 홍씨)


위에 영조의 가계도를 보면 후궁인 영빈 이씨 아들이 사도세자인데, 후에 아버지인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만에 죽는(임오화변) 비운의 인물입니다. 사도세자의 정신병 등으로 인한 각종 패륜 행위는 임오화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임오화변 당시 영조는 나이가 많았던 상황이고 세손(정조)는 11살 밖에 되지 않았았기에 사도세자가 사라지면, 자칫 이씨 조선 왕실 존재 여부가 어지러워질 수도 있는 걸 고려하면 더 넓은 시야로 영조를 바라볼 수 있씁니다.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각종 비행을 왕에게 간하게 되는 '나경언의 고변'을 계기로 영조는 사도세자와 관련 책임자들을 죽이게 되고 고변한 나경언 또한 죽음에서 피해가지 못합니다. 이런 일련의 내용들은 사도세자의 정실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말년에 한가한 사황에서 기록한다는 뜻의 《한중록》이라는 책을 집필합니다. 참고로 《한중록》에 기록된 내용들의 신빙성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기는 합니다.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동구릉 中 영조 원릉


영조는 연잉군 시절부터 갖은 모함을 들어오면서 목숨이 위험했던 적도 있고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미천한 출신이었다는 정통성 문제시비를 시작으로 이런 정통성 논란에서 끝까지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영조는 매사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아들(사도세자)에 대해 영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르는 인물이 되길 바라는 기대가 컸었는데, 사도세자는 학업에 매진하지 않고 덩치도 크고 무인기질을 보이자 사도세자가 곱게 보이지 않았던 영조는 사도세자와 얘기를 나눈 뒤에는 꼭 스스로 매번 귀를 씻어내고 사도세자가 덩치가 큰 것을 보고는 그만 좀 먹이라는 식으로 화풀이가 계속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점점 틀어지더니 결국에는 영조의 계속되는 압박으로 사도세자는 정신병적인 증세를 보이며 애먼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푸는 비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실록에도 사도세자가 광증이라는 정신병을 앓고있던 증세가 기록되어있습니다.



▲ 영조의 손자 정조 어진


결국 사도세자를 죽게한 그 근본적 이유를 찾아보면, 사도세자가 영조 자신이 원하는 왕이 되어 영조 자신의 정통성 시비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영조 자신의 아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게되자, 큰 기대는 큰 실망감을 낳게되어 영조는 사도세자와 돌이킬 수 없는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천성을 고려하지 않은 영조 본인이 추구한 인간상을 아들에게 압박하고 강요한 것 또한 그 근본적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탕평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영조를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영조는 결국 당파들의 견제와 화합을 이끄는데 실패하고 최종적으로 척신세력을 끌어들여 자신에게 쓴소리를 하는 신하는 내치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이들을 등용을 하였고 피붙이인 사도세자를 죽여 부자간의 탕평에도 실패합니다. 탕평이라는 타이틀을 영조에게 걸기 부적합한 대표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영조의 청계천 준설 행사(1760)


탕평에는 실패했지만 영조는 많은 업적을 남깁니다. 대표적으로 청계천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위해 청계천 준설 공사를 지시하고, 군역의 폐단을 완화하는 균역법을 실시합니다. 사형수에게 3번의 재판을 받게하는 삼심제를 실시하며, 노비종모법을 실시하여 양인인 여성과 노비인 남성 사이에 나온 백성을 양인으로 삼아 군역 담당 백성들의 수를 늘려 국방을 신경씁니다. 국방에 대해 업적이 더 있는데, 수성윤음이라는 명을 내려 서울백성이면 누구나 수도방위 업무를 맡고있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에 소속되게 하였고, 서울의 부유한 계층이 국방비를 부담하게 하도록 합니다. 



▲ 무예술을 재정리한 《속병장도설》


당파인들이 가지고있던 병권을 병조(나라)에 귀속시키기도 하죠. 60세 이상의 노인들도 문무과를 시험봐서 관직에 진출할 기회를 열어주고, 노비공감법이라 제도를 만드는데 이것으로 노비들에게 신역대신 부과하는 대가를 반감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문고를 부활하여 왕이 행차할 때 꽹과리 등을 치고 왕에게 백성들의 억울한 점을 말할 수 있는 제도도 형식적으로나마 만들게 됩니다. 《속대전》, 《속오례의》, 《속병장도설》 등의 서적도 간행하는 업적이 있습니다. 



▲ 갈등을 필수 조건으로 보는 민주주의


우리는 현재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갈등을 발전의 필수 과정으로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것에 주목해야합니다. 탕평이라는 것은 당쟁으로 인해 국가의 정치가 마비가 되어 민생에 신경을 쓰지 못할 때 그것을 완화하여 자유롭게 당파들끼리 서로의 정책을 주장하며 건강한 논쟁과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 지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지, 오로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여 말 잘 듣는 이들을 등용하여 조정을 조용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탕평이 성공한 게 아닌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영조가 백성을 위해 행한 여러 업적은 인정하되, 탕평은 개인적인 이득을 위한 허울뿐인 명분론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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