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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마녀사냥 희생자 장희빈: 숙종에게 장희빈이 버려진 이유

장희빈은 조선시대의 악녀로 유명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 장희빈 소재의 사극이 시청률이 워낙 높은 데다 극중에서 드라미틱한 플롯을 위해 장희빈을 독하고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물불 안가리는 인물로 연출해서 그런 듯합니다.


한국인들이 가지고있는 장희빈에 대한 오해는 꽤 깊습니다. 일단, 장희빈은 연산군의 어머니가 아니라, 숙종 뒤에 왕위에 오르는 경종의 어머니입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와 장희빈이 비슷한 삶을 살다가 같이 왕의 명에 의해서 죽게된다는 공통점 때문에 연산군의 어머니가 장희빈이라는 오해를 많이들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희빈이 왕명으로 사사 당하거나 또는 자결할 때, 왕실의 대를 끊어서 복수하겠다며 경종이 후사를 낳지 못하게 성기를 잡아서 망가뜨렸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것도 정통 역사서인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장희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숙종 당시 조선의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희빈 장씨(장희빈)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안 좋은 평을 당시 뿐만이 아니라 후대에까지 계속해서 받게되었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고 장희빈의 억울할 수 있는 점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다시 생각하거나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부분의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죠.



 ▲ 숙종 (1661-1720, 본명 : 이순)


위 그림이 숙종의 얼굴을 대략적으로나마 알아볼 수 있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하다 볼 수 있는, 열성 어진에 그려진 조선 19대 왕인 숙종의 모습입니다. 숙종은 재위기간도 46년 정도로 자신의 아들인 영조(51년 7개월) 다음으로 길었고 왕권도 조선시대의 그 어떤 왕보다 강했던 사람입니다. 그만큼 숙종이 갖는 견고한 왕의 정통성으로 신하들도 감히 왕을 어떻게 할 딴 마음을 가지기 힘든 상황이었죠.



▲ 장희빈 (1659-1701, 본명 : 장옥정)


역사기록에, 여인들의 외모를 칭찬하는 글의 거의 없거나 하더라도 박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사기록에서 장희빈의 미모가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조선에서는 장희빈이 상당히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그런 장희빈은 궁녀로 시작하여 숙종의 후궁이 되고  훗날 왕비에까지 오르는 조선시대 전무후무한 입지전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 숙종의 글


숙종 때에는 당시 선비들이 당파를 결성해서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려하고, 숙종은 이를 이용해서 어느 신하 세력이 비대하게 커지는 것을 견제하고 자신의 왕권 강화를 추구하는 '환국정치'의 시대라고 불려집니다. '환국'이라는 것은 정치판세 또는 집권세력이 급작스럽게 바뀌는 상황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 숙종22년 경종의 친필


대표적으로 서인 세력과 남인 세력이 서로 부딪히고 훗날 남인이 정쟁에서 패하여 거의 사라지게 되면, 서인 세력 자체에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젊은 소장파 부류의 소론과 주자학 등 유교 정통론을 고수하는 노론 세력으로 또 나뉘게 되는 상황을 보입니다.




▲ 연잉군 초상(훗날 영조)


장희빈은 남인쪽 세력의 인물이었고 장희빈과 각을 세웠던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는 서인쪽 세력의 인물이였습니다. 숙빈 최씨라는 후궁또한 서인쪽 인물이었고 장희빈과는 반대세력이었습니다. (숙빈 최씨가 낳은 연잉군이 훗날 영조가 되게 됩니다.) 이런 궁중 암투로 여지는 싸움들은 단지 여인들의 투기가 아니라 조선 사대부들의 양 세력의 대표로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서로 궁궐에서 붕당정치 싸움의 연장선에서, 각 붕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최전선에서 싸우는 형태였던 것이죠.



허목 (1595-1682, 남인의 중진)


환국 전에 예송논쟁부터 살펴보면 숙종 치세에 있었던 당파싸움과 환국에서의 장희빈에 대한 이해가 더 쉽습니다. 예송논쟁은 총 2번 일어나는데 기해년(1659)과 갑인년(1674)에 각각 효종과 효종의비가 죽자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에 대해 서인과 남인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서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상대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예송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기해예송에서는 서인의 1년설이 받아들여졌지만, 갑인예송에서는 숙종이 직접 남인의 1년설을 채택하여 서인세력이 상당부분이 타격을 받는 상황이 나옵니다.



송시열 (1607-1689, 서인과 노론의 영수)


경신환국(1680)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당 독제체제 형태가 나타나고 숙종은 계속 당파의 세력을 저울질하며 어느 한 쪽이 커졌다 싶으면 커진 신하 세력을 제거하는 식으로 자신의 왕권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전략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경신환국에서는 서인이 남인을 누르게 되고, 서인 자체적으로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과 윤증으로 대표되는 소론으로 나뉘게 됩니다.




▲ 장희빈에게 사약을 먹이는 장면 (사극 장희빈 中)


기사환국(1689)은, 출궁되었던 남인 세력의 궁중대표격인 장희빈이 다시 궁으로 돌아오고 아들 경종을 낳게되자 숙종의 총애를 받게되는 장희빈과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송시열 등 서인세력들이 왕에게 상소를 올리는데, 송시열 세력이 결국 왕에게 죽임을 당함으로 남인이 집권하게 되는 것을 기사환국이라 말합니다.



▲ 대표적 두 세력의 갈등 (미국 남북전쟁)


갑술환국(1694)에서는 숙종이 장희빈을 사사 또는 자결시키고 이로인해 남인은 재기 불능에 다다르며, 인현왕후(서인)는 다시 왕비로 복권되어 서인 세력이 집권하게 됩니다. 여기서 서인 세력은 소론과 노론세력으로 갈라져 양자 대립이 극도로 다다르게 되기도 합니다.



▲ 장희빈의 묘 (대빈묘)


결국 지금 우리가 아는, 묘사된 장희빈의 성격 등은 장희빈(남인세력)의 반대세력인 서인 세력이 쓴 소설 《인현왕후전》에서 나온 왜곡되고 평가절하된 모습의 장희빈을 곧이곧대로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이게 되어 나타난 모습이우리에게 그대로 투영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 17세기 유럽의 마녀사냥

제가 설명한 환국정치를 이해하면 결국 장희빈도 숙종의 왕권강화 정치수법에 희생당한 인물인 것입니다. 장희빈의 반대세력이 근거없이 몰고가는 악녀 이미지에서 그리고 마녀사냥격 선동에서 이제는 장희빈을 자유롭게 해 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소빙하기 시절의 유럽


17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지구의 기온이 1도 떨어지는 소빙하기가 왔던 시절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정규 역사교육에서는 자세히 배우지 않지만 17세기에 경신 대기근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나와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과 병마로 인해 사망한 시절입니다.



▲ 17세기 전세계적인 소빙하기(빨간 동그라미)


유럽에서도 낮아긴 기온에 농사를 망치고 백성들의 분노는 폭력으로 나타나 많은 죄없는 여성들이 마녀사냥으로 인해 화형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던 시기가 바로 장희빈이 살던 때입니다. 물론 장희빈은 경신대기근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그녀가 죽게 되었다는 것은 아입니다.


▲ 마녀사냥 당하는 장희빈 같은 여인


그 시절을 대표하는 잔혹한 정치의 상황의 패배자로서 최후를 맞이한 것을 이해하고 실록 등 정사에 나온 내용으로 장희빈을 판단하되, 많은 부분을 담을 수 없는 실록의 여건상, 소설이나 야사 등에 나온 장희빈에 관련된 이미지는 그저 재미있는 흥미거리 및 참고사항으로 보는 여유도 가져보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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