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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김유신 장군 : 전쟁에서 김유신이 거의 무패를 한 비결

자신이 아끼던 말의 목을 자른 일화로 유명한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또한 당시 적국이었던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거의 승리를 거두는 무패의 장군으로도 유명합니다.


신라의 왕이되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를 도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일하여 삼한일통을 이루는데 큰 공을 세우는 김유신 장군은 후에 흥덕왕 대에 신하로서는 최초로 왕으로 추존되기까지 합니다. (추존: 왕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죽은 후에 그에게 왕의 칭호를 주던 것)


지금 우리는 조선시대의 이순신 장군이나 고려의 강감찬, 고구려의 을지문덕처럼 이민족인 외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을 더 기억하고 있지만, 이런 장군들과 비교하여 김유신 장군을 고평가하기엔 당시 고구려, 신라, 백제라는, 현재 시점에서 우리의 선조인, 한민족들끼리 싸운 전쟁에서 확약한 영웅 김유신을 그리 뛰어난 인물이라 여기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서는 김유신이 잘했느니 못했느니 따지기보다는 김유신의 성공에 어떤 점이 작용하고 있었는지 그 핵심요소를 찾아내보려 합니다.



▲ 김유신 (595-673, 표준 영정)


김유신은 신라의 법흥왕에게 항복한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으로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자 김유신의 증조부인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을 하자 금관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이 됩니다. 자신의 조부인 김무력은 신라와 백제가 완전히 반목하는 포인트인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죽이는 공을 세웁니다. 김유신이 어려서는 화랑에서 김유신을 따르는 용화향도라는 명칭의 패거리를 이끄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김유신이 열여덟살이 되는 해에 '국선' 이라는 화랑의 리더가 되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김유신 초상화


신라 진평왕 대에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명을 받고, 김유신은 자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을 따라 신라와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전하는데 고구려군의 역습으로 1차전투에서 신라군이 크게 패하고 신라군의 사기가 크게 꺾이자, 김유신이 '그물 손잡이(벼리) 당기면 그물이 펴지고 옷을 바르게 정돈하면 옷 형태가 비뚤어지지 않는다면서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하겠다'고 하고 고구려군이 있는 적진으로 뛰어들어 동분서주하여 결국 적장의 목을 베고 적(고구려군) 깃발을 뽑아옵니다. 이런 김유신의 패기로 인해 신라군의 사기가 오르게되고 결국 고구려의 낭비성은 신라군에 의해 함락되게 되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김유신에 의해 낭비성이 함락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 KBS 사극 대왕의꿈 中의 김유신


김유신이 50세가 되던 511년에 김유신 장군이 백제땅으로 출정하여 7개의 백제성을 함락하고 512년에 신라로 귀국하였지만 왕을 알현하여 승전을 보고하기도 전, 집에들러보지도 못한상태에서 백제군의 대규모 군대가 공격해오자 다시 백제군을 진압하러 곧장 말머리를 돌려 나갑니다. 




병사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피곤하고 절망감이 컸을 겁니다. 어찌됐든 백제군에게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또 백제군의 공격소식이 들리자 김유신은 병사들의 불평불만을 억제하고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자신도 바로 코 앞에 있는 자택의 우물에서 물을 떠오라고 시키더니 그 물을 마시고 집의 우물 물맛은 여전하니 됐다'며 집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다시 말머리를 돌려 다시 출정하게 됩니다.



▲ KBS 사극 대왕의꿈 中 비담(?~647, 가운데)


647년에 비담과 원종이,  여성인 선덕여왕이 신라의 왕을 하니 나라가 어지러워져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세력과 비담의 세력이 몇 날 며칠(10일) 전투를 벌이고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유성 하나가 선덕여왕이 있는 방향으로 떨어지자, 비담은 '왕이 패배할 징조고 우리(비담의 세력)가 승리할 징조'라 하여 자신의 병사들의 사기를 올립니다. 김유신의 병사들은 반대로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김유신이 허수아비 인형에 불을 붙여 공중으로 띄우더니 떨어진 '별이 다시 솟아 오르니 김유신의 병사들이 필히 승리할 것'이라며 군사들의 동요를 잡고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게 됩니다.



▲ 백제 장군 계백(607-660, 대왕의꿈 中)


김춘추가 당나라와의 외교성과로, 백제를 공격하는 것에 대하여 당나라 군의 원병을 약속받아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660년에 당나라의 소정방을 필두로한 13만 수군병력과 신라의 5만 병사가 각각 수로와 육로로 백제를 공동엽합하여 치기로 하였는데 백제의 장군인 계백이 5,000명의 결사대로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50,000 군사의 발목을 잡게됩니다. 김유신은 계백보다 10배가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계백의 5,000 병사를 궤멸시키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김유신은 어린 화랑들을 계백의 진영에 차례차례 홀로 보내고 어린 화랑들이 죽어나가자 김유신의 신라군 진영의 병사들은 분노는 커지고 사기가 오르게 됩니다. 김유신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계백과의 일전을 벌여 결국 김유신 부대가 계백 군사를 괴멸시켜 승리하게 됩니다. 



▲ 당나라 소정방(591-667, 대왕의꿈 中)


계백의 결사대를 힘겹게 상대한지라 당나라 소정방과의 약속 장소에 하루 늦게 도착하게 되었는데, 당시 나당연합의 사령관이었던 소정방이 늦게 도착한 죄를 물어 김유신의 부하장수 김문영을 죽이려하자 김유신은 소정방에게 '사정도 모르면서 죄를 물으려한다면 먼저 당나라와 전쟁을 벌여 이긴 후 백제를 멸하겠다'고 단호하게 나가니 소정방도 한 발 무르게 됩니다. 후에 당 고종이 소정방보고 신라를 도모하는 것에 대해 묻자 소정방은 신라는 작은 변방의 나라지만 김유신이라는 명장이 지키고 있기에 숙고해야 한다고 얘기할 정도로 소정방은 김유신을 인정하게 됩니다.



▲ 오자 (? ~ B.C. 381 오기)


중국의 전국시대에 오자병법의 저술로 유명한 오기(오자)도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린 인물로 유명한데, 손자병법이, 적은 수의 아군병력으로 많은 수의 적군을 상대하는데 효과적인 기만술 같은 화려한 전략을 설명하는 병법서라는 느낌이 강한 반면, 오자병법은 정공법 같은 타입의 병법서입니다. 대군으로 적은 병력을 쳐야하니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식이 오자병법의 색깔이죠. 실제로 오자(오기)가 지휘하던 병력 중에 어떤 한 병사가 오랜 행군으로 발이 썩어문드러지는 지경에 이르자 오자(오기)가 직접 그 병사의 신발을 벗기고 고름을 빨아냅니다. 지체높은 신분의 오자가(오기) 최하위 계급인 병사의 발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내는 장면을 직접 본 주위에 병사들이 놀라서 이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고, 사기가 급격히 오른 오자의 병사들은 결국 전쟁에서 연거푸 승리하게 됩니다.



▲ 군인의 사기 진작


김유신 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화랑에서 자신을 따르는 패거리(용화향도)를 움직이는 방법을 알고있던, 사기진작 전문가 유망주였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려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기도 하고, 강하게 압박하는 상대(소정방)에게 찬물을 끼얹는 퍼포먼스로 특정인의 사기를 꺽어버리기도 합니다. 다 꺼져가는 병사들의 의욕에 다시 불을 지펴 병사들을 각성시기켜 필요할 때 군부대의 전투력을 최상치로 유지시키기도 합니다. 문무왕 대인 662년에는 소정방이 평양을 에워싸고있었는데 원조물자가 절실한 소정방이 신라에 물품원조를 요청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솔선수범. (김유신 동상)


당시 소정방은 신라의 적인 고구려 진영에 있던 상황이라 신라의 장군 중 누구하나 보급지원을 가겠다고 자원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나이많은 김유신이 직접 그 임무를 자원하여 소정방에게 군수물자 보급지원을 나가게 되게 됩니다. 고구려 진영에 들어가는데 건너야 하는 '칠중하 강'에 이르자 김유신의 병사들이 혹시 모를 강 건너 반대쪽에 매복하고 있을 고구려 병사들 존재 때문에 두려워여 누구하나 먼저 건너지 않으려하자, 68세의 김유신 장군이 병사들을 호통으로 야단치며 김유신 장군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배를 타고 '칠중하 강'의 반대쪽 고구려 진영으로 건넙니다. 김유신이 강을 도하하자 나머지 신라 병사들도 따라 건너게 됩니다.



▲ 병사의 사기는 전쟁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


김유신 장군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제 제가 왜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인 오자병법의 오기(오자)를 얘기한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김유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심리 전문가이자 군 병력 지휘 및 통솔, 선동의 달인입니다. 이런 능력이 병사를 움직이는데 탁월했고 병사들의 감정기복을 컨트롤하여 사기를 올려 전쟁에서 매번 승리를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김유신의 이런 면을 주목하고있고 김유신을 동방의 오자로 부르고 싶은데 여러분들 의견은 어떠십니까.



▲ 김유신 장군 묘


*김유신에 관한 추가 참고내용


김유신 장군 묘 : 김유신 장군의 묘는 진위여부의 논란이 있는 상태입니다. 무덤을 지키는 의미를 지닌 12지신 모양의 호석을 무덤 둘레를 따라 세워놓은 것이 김유신 장군묘의 특징입니다.


말의 목을 자른 이유 : 김유신 장군의 어머니인 만명부인이 김유신 장군이 천관녀(기생)에게 반하여 기생집에 자주 드나들자 어머니가 이를 못마땅해하자 김유신이 그러지 안기로 다짐하였습니다. 허나 술에 취해서 말 위에서 잠시 졸았는데 잠에서 깨보니 천관녀 집의 앞에 와있던 것입니다. 김유신이 어머니의 질책에 스스로 다짐했던 일이 깨어지자 애꿎은 말의 목을 잘라내며 화를 낸 것입니다.


김유신의 탄생지 :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과 어머니인 만명부인의 교제를 진평왕의 아우인 이자 만명부인의 아버지인 숙흘종이 반대하게 되자, 기회를 틈 타서 김서현과 만명부인은 만노군으로 도망치다시피 합니다. 신라시대의 만노군은 지금으로 따지면 충청북도 진천군입니다. 진천군에 김유신의 탯줄을 묻은 태실도 위치하고 있습니다. 

즉, 김유신의 고향은 경주가 아니라 '진천'인 것입니다.


김유신의 부인 :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아내들 중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희(문명왕후)가 있습니다.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 딸인 '지소'가 다시 김유신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것이죠. 즉 김유신은 조카와 혼인을 올린 것인데, 현대시대의 유교논리에 익숙한 우리가 보기에는 좀 이상할 수 있어도 당시에는 왕족의 재산을 지키고 권력을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기 위해 이렇게 가까운 촌수 내에서 다시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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