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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 관해서 진부하지만 중요한 의제가 있다. 신라의 김춘추가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성공시켜 나당동맹의 병력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이 과연 같은 민족으로서 할 일이냐 하는 성탄에 대한 역사관의 논쟁의 주안점이 그것이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대시절에는 한민족이라는 관념이 없던 시절이라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적국이었고 각자 자신의 국가존립을 위해 '당'이라든지 '왜'라든지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상대국을 공격하는 것을, 같은민족을 배반하는 행위라는 관점에서 볼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끌어들인 당나라로 인하여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를 잃고, 사대주의 사상이 계속되는 신라 스타일의 명맥이 지금 현재 시대인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그보다는 김춘추가 어떻게 열세인 신라의 상황을 최종 승리자가 되도록 하는 기반을 닦았는지 그 비법, 비결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 김춘추 (604-661, KBS 사극 대왕의꿈 포스터)


당시 신라시대는 엄격한 골품제 하에 진골 출신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재위 4년만에 폐위됨으로써 김춘추는 성골이 아닌 진골이 되었고 이는 어머니(천명부인)가 진평왕의 딸인 성골출신이라는 점에서 생각해봐도 태종 무열왕 김춘추로서는 자신의 몸에는 성골의 피가 흐르지만 정치적 견제세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진골이 되어, 자신이 신라의 왕이 되기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라는 것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여야 했을 것이다.




▲ 김유신 (595-673, 조선명현초상화사진첩 中 김유신 초상)


결정적으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를 신라 왕에 옹립시키는데 최고의 공은 세운 김유신 또한, 법흥왕에게 망한 금관가야 왕족 출신으로서 신라의 진골로 편입은 됐지만 원래의 신라 진골귀족세력에게 견제받고 외부편입세력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명백한 한계가 있던 인물이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서로의 약점인, 김춘추의 군세와 김유신의 정치세력 미비점 부분을 서로 보완해주며 공동의 목표를 향해 의기투합하는데, 호걸은 호걸을 알아보고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김유신이 자신의 누이동생인 보희와 문희에게 축국(축구)를 하다가 옷고름이 망가진 김춘추의 옷을 꿰매라고 하자 문희가 김춘추의 옷고름을 꿰매준 인연으로 후에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문희가 결혼을 하게됨으로써 김유신과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인척으로 맺어지게 된다. (김유신이 의도한 일)



▲ 6세기 삼국 세력도


과거 한반도의 500년대인 6세기에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 가야가 각축을 벌이던 시기이다. 결국 금관가야 구형왕은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532)하고 대가야 도설지왕은 신라 진흥왕에 항복(562)을 하여 가야 세력은 신라에게 병합하게 된다. 백제와 신라는 서로 합심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되찾지만,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와의 협력 약속을 깨고 한강을 독차지하자 백제 성왕이 진노하여 신라를 치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사망(554)하게 된다.



▲ 백제와 신라의 대야성 전투(642)


600년대에 들어와서, 약속을 어기고 백제의 뒤통수를 친 신라와 이를 응징하려던 백제의 성왕이 사망하자 철천지원수의 사이가 된 백제와 신라는 전쟁을 계속하는데, 의자왕이라는 걸출한 인재가 백제의 왕위에 올라 신라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대야성이라는 신라 거점 방어 요충지를 백제 의자왕이 함락시키게 된다. 




이 곳(대야성)에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이자 대야성주인 김품석이 있었는데 둘 다 백제군에 의해 사망하고, 김품석이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자 김품석을 사위로 뒀던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된다.



▲ 고구려 연개소문 (603-666)


신라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김춘추는 백제를 협공할 동맹국을 찾으러 떠나게 되는데, 적국이나 다름없던 고구려에 가서 당시 고구려 실권자 연개소문에게 백제를 공격해줄 것을 청하지만, 연개소문과 보장왕이 예전 고구려 땅이었던 한강 유역을 돌려주면 백제를 공격해주겠다는 사실상의 거절의 의사를 김춘추가 듣게되자, 김춘추는 난색을 표하다 고구려땅에 억류당하게 된다. 김유신이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에서의 고구려를 공격할 스탠스를 취하며 농성하고(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고구려도 떠나기 직전 함께 의리를 다지는 의식을 행한 김유신), 김춘추는 고구려 관리에게 뇌물을 주는 등의 기지를 발휘하여 고구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김춘추는 결국 고구려로부터의 병력원조를 얻는 데에는 실패하고 만다



▲ 당나라를 패퇴시킨 안시성전투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외교협상에 실패하자 647년에는 왜(일본)으로 건너가 평소 백제와 관계가 돈독했던 왜에게 백제를 돕지 말 것을 종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것 또한 역시 실패하고 658년에는 당나라로 당태종을 만나러 가게된다. 당나라는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렸고, 당나의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향해 맹공을 펼쳤지만 안시성 전투(645)에서 당나라가 완패를 하여 수나라에 이어 대국의 체면을 구긴 상황이었다. 때문에 당시 당나라에서는 고구려 배후의 세력인 신라의 협조가 필요하던 상황에서 김춘추가 사신으로 당나라에 오자 환영하는데, 결국 신라와 당나라는 동맹을 맺고 함께 백제를 쳐서 대동강 이남의 땅은 신라가, 그 위의 고구려땅은 당나라가 갖기로 하고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결국 그 강성하던 고구려까지 멸망시킨다.



▲ 태종 무열왕 김춘추 표준영정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목숨을 걸고 고구려로 가서 외교적 성과를 이루려 했었고 이에 실패하자 왜(일본)로 가서 백제의 지원세력을 끊으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때문에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외교의 달인이라기 보다는 위기상황에서 신라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시도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대담하게 시행하는 내적가치에 충실한 호걸적 인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시정잡배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한신'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의 이야기인 중국 역사소설 '초한지'에는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전쟁의 신 '한신'의 일화가 적혀있다. 한신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 어떠한 치욕도 견디는 내용인데, 시정잡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며 큰 일을 그르치게 되는 분쟁을 미연에 예방하는 과하지욕(胯下之辱)이 나와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한신의 과하지욕만큼은 아니겠지만 진덕여왕에게 직접 수를 놓아 당태종을 칭송하는 태평송을 보내게 하는 등 당나라의 병력을 움직이기 위해서 갖은 고생과 모든 노력을 겪고, 해보려 한 것이다.



▲ 김유신 표준영정


결정적으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최고의 비결은 김유신이라는 희대의 명장과 운명적 공동체로서 함께 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신의 큰 뜻을 펼치는 인물들 옆에는 항상(또는 대부분) 능력이 뛰어나고 의리(충심)가 강한 인물들이 함께 있었다(태종 무열왕 김춘추에겐 김유신이 그러한 인물). 이런 인물들과 인연을 나눈다는 것은 어쩌면 본인 자신도 비범한 인물을 보는 그런 깜냥이 되는 것이고 자신에게 뛰어난 인재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 《일본서기》


실제로 당태종도 김춘추를 보자 호평을 하고, 왜(일본)에 갔을 때의 기록이 적힌 《일본서기》에도 태종 무열왕 김춘추를 묘사하길 '외모가 수려했고 말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결국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김유신으로 인해 고구려에 억류되어있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비담과 염종의난을 제압하고, 백제 고구려와 수 많은 전투를 치러 승리하며 결국 진골 신분으로서 최초로 신라 왕에 올라 신라 중대 시기를 중흥시키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 뛰어난 리더의 조건


아마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그러한 매력에는 대의를 위해 망설임 없는, 거침없는 기치를 보이고 이를 실행하며 계속되는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에서 성공하는 리더의 자질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을 것이다. 인내심이 강하고 현실적이며 목표지향적인 그에게 김유신 같은 영웅이 힘을 보태고 운이 따라주게 되는 상황은 결국 태종 무열왕 김춘추 자신이 결과적으로 그런 수혜를 입게되는 지나온 과정을 착실히 밟아 자신을 성장시켰기에 가능하리라 본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과 저 또한 한계에 좌절하지 말고 매사에 끊임없이 최선 또는 차선책을 찾아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면 뛰어난 인재와 적합한 환경이 나에게 다가와 힘을 보태줄 상황이 분명 오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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