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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인조: 소현세자 죽이고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불러온 원인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한 평가를 할 때, 그 일을 맡게되는 조직의 수장에 대한 책임을 가장 높게 물으려 합니다. 이건 리더가 가지는 영향력과 권한을 봤을 때 너무 당연한 일인 것이죠.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인류의 과학적 인문학적 지식이 높아질 수록, 사람과 환경 그리고 시스템의 역학관계를 전보다 명확히 이해하게 되고, 안 좋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특정인인 한 명의 사람에게 모든 과오를 덮어 씌워 물으려 하는 것 또한 판단과 평가의 오류임을 알게 됩니다.


훌륭한 인품을 지녔다고 평가받았던 31대 미국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 (Herbert Hoover) 는 대통령 재임기간 대공황을 겪게되자 미국 국민들이 모든 잘못은 후버에게 있고 후버가 모든 걸 망쳐놓았다고 비난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과거 노무현 대통령 시절 경제가 안 좋자 모든 것은 노무현 때문이라는 말이 이곳 저곳에서 많이 터져나오곤 했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던 시절에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는 과연 어떤 실책으로 조선 백성들을 힘들게 만들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며 인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왕이었다면, 인조를 대리할 리더는 어떤 가치관과 타개책을 가져야 양대 호란을 막을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면 스스로의 시야를 넓힐 수 있고 상황의 핵심을 파악하며, 다루는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조 (1595-1649, 본명: 이종) KBS 사극 추노 中)


쿠데타에 성공한 인조반정 세력들은 광해군을 선조의 계비였던 인목왕후 앞에 끌고가서 영창대군을 죽인 죄 등을 묻게 되고, 결국 광해군과 그의 식솔들은 유배되게 됩니다. 광해군의 아들인 폐세자 질은 유배지 탈출에 실패하여 자결하고 며느리도 따라 죽게 되며 광해군 부인 유씨도 곧 사망합니다.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철저하게 광해군 후원 세력이었던 '북인'들을 숙청해 나갑니다.


이괄의 난의 여파에서 그에 관한 동조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옥에 갇힌 북인 대부분을 처형하게 되고, 그 이후 조선사에서 다시는 이렇다할 북인관련 활동이 나온 기록이 없을 정도로 숙청은 철저했습니다. 인조는 반정의 공신 세력의 입김이 세지자, 서인을 견제시킬 남인과 산림세력을 등용하기도 하죠.



▲ 이괄의 난 남진 루트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 아닌 2등 공신으로 책봉되는 이괄은 이에 불만이 있었고, 반정내부 세력의 권력다툼에서 이괄이 밀리게 되자 이괄의 반대세력이 이괄의 아들을 한양으로 압송하려 하면서 더더욱 이괄을 압박합니다. 이에 이괄은 난을 일으켜 빠르게 한성으로, 평안도 지역의 병사 등 총 12,000여명을 남진시키고 결국 한성에 입성하게 됩니다. (이괄의난: 1624)


인조는 공주로 몽진(피난)가 있는 상황이었고 결국 관군들이 한성을 수복함으로서 이괄의 난을 진압하게 되는데, 다시는 이괄처럼 국경 변방지역의 강성한 정예군들이 왕에게 칼날을 겨누지 못하도록 인조는 각 지역의 장군들이 병력 증강을 하는 것과 그들을 훈련시키는 상황을 철저히 감시하게 됩니다. 각 지역의 장군들은 군사훈련 등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다가 자칫 역모로 고변당할 수 있기에 굳이 군사훈련에 힘을 쏟지 않게 됩니다.



▲ 정묘호란 후금군 진격 루트


이괄의 난이 진압되고 이괄과 함께 모반을 일으킨 한명윤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 '한윤'과 '한택'이 후금으로 탈출하여 당시 친명배금 정책을 알리고 조선의 지리 정보등을 후금군에게 넘기게 됩니다. 누르하치(후금의 창업자)의 아들인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는 인조반정을 일으킨 조선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장수(버일러) '아민'에게 3만명의 후금 기병으로 조선을 치게 하였습니다. 빠르게 남하하여 성들을 함락시키자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을 가게되는데 뜻밖에 후금에서 먼저 조선에게 강화를 요구하게 됩니다.



▲ 홍타이지 (1592-1643, 청나라 태종) 숭덕제


강화 조건을 보면,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관계를 맺고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하게 되는데 이는 후금 기병이, 위에서 봤던 후금 진격 루트 지도처럼, 빠르게 치고 내려왔기에 조선의 지원군이 규합되어 조선 깊숙히 들어온 후금군을 포위하게 되면 식량 등 군수품 보급이 끊길 가능성이 높았으며 명나라가 후금군을 칠 수도 있었던 위험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묘호란(1627)은 후금이 조선과 특정 조건으로 강화를 성립하려는 목적으로 사전준비하고 계획하여 일으킨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 남한산성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홍타이지는 조선이 정묘화약의 내용을 지키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정묘호란이 있고 난 후 9년만에 다시금 10만대군을 조선에 출병시킵니다. 미처 강화도로 피난을 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면서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인조를 구출하기 위한 지원군대가 모두 청나라에게 패하고 다른 원군세력들은 눈치만 보고 남한산성에 원병을 보내지 않는 상황이 되자 결국 인조는 홍타이지에게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인조는 청 태종 홍타이지 (숭덕제) 에게 3번 절을 하고 절을 할 때마다 3번 머리를 땅에 박는 치욕적인 '삼배구고두례' 항복의식을 보이게 됩니다.



▲ 삼전도 비 (청태종공덕비)


청태종 홍타이지는 조선의 소현세자와 왕자들 그리고 대신들과 많은 백성들을 인질삼아 청나라 수도인 심양으로 끌고갑니다. 소현세자는 약 10여년 동안 청나라에서 머물동안, 청이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되고 북경에서 선교사 아담 샬 등을 만나 서양의 많은 발전된 문물 등을 접함으로써 당시 조선의 친명배금 척화파 정신과는 상반되는 생각으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부국강병의 원대한 꿈을 꾸지 않았나 추측되고 있습니다.



결국 청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세자가 얼마 되지 않아 죽게되고, 인조가 소현세자의 아내되는 민회빈 강씨를 사사시키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이자 인조의 손자 3명을 전부 유배시키게 되는데 곧 유배된 3명의 손자 중에 2명이 죽게 되죠. 이런 정황들은 인조가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를 독살이나 암살했을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 인조 가계도


능양군 (인조) 은 반정(옳은 것으로 되돌림)이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결국 무력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형태이기에 정통성이 약한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10년동안 아버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 (사망 후 왕으로 삼는 것) 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고 결국 뜻을 이루게 됩니다. 정원군은 원종으로 추종되어 선조-원종-인조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왕통을 보이게 된 것이죠. 세자로 삼은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죽자 바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게 되는데, 봉림대군이 인조 다음 왕인 효종이 됩니다. 인조는 26년의 즉위기간동안 자신의 왕권을 다른 쿠데타 세력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절치부심했고 이것이 결국 소현세자까지 죽이게 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 것이죠.



▲ 당시 국제 정세 판도


후금은 몽골 지역을 정복하여 서진을 하게되고 명나라와 후금이 맞붙게 되는 상황이 도래합니다. 조선은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고 외교전 전략을 구사했어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영토 가도 (섬) 에서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자리잡고 후금을 위협하고 있던 상황입니다. 후금은 이제 명나라를 쳐야 하는데, 조선 땅에서 모문룡이 뒤를 칠 수 있으니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먼저 쳐서 후방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이죠. 이런 국제정세 상황에서 인조가 광해군처럼 실리외교를 했다고 해도 청나라가 조선을 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명분적으로 친명배금을 외치던 조선이었지만 후금을 실제적으로 자극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었고 때문에 후금이 조선으로 쳐들어오자 왜 쳐 들어오는지 조선 조정에서는 의아해 했었다고 합니다.


▲ 청나라 최대 영토


결국 유목민족들이 세력을 넓혔을 때는 만주족이든 몽골족이든 한반도 지역을 손봐주는 절차는 빼먹지 않고 해왔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때문에 굳이 먹을 것 없는 계륵 같은 작은 땅덩어리인 조선을 힘들여 정복하여 직접 관리하는 것보다 군신의 관계를 맺어 알아서 세금을 올리게 해놓고 필요할 때 자원과 병력을 뽑아올 수 있게 만들어 놓는 것이 비용적인 측면이나 관리 효율적인 측면에서 중원을 차지한 이들에게 가격 대 성능비에서 유리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조선은 큰나라를 섬기며 알아서 기는 모습을 보였기에 그 정도 선에서 청태종 홍타이지는 조선을 길들이려 한 것입니다. 때문에 삼전도의 굴욕에서도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으로 죄인의 국가인 조선을 용서하는 아량을 베푼다는 뜻에 청태종 공덕비를 세우게 시키죠. 이것이 삼전도 비 입니다.


▲ 이자성 농민군


결과적으로 인조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업신여겼기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맞이하게 됐다는 분석은 사실 충분하지 못한 국제정세 파악능력의 한계에서 나오는 판단입니다. 인조가 아니라 광해군이 계속 실리외교를 했다고 해도, 당시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는 상황, 명을 공격하던 청을 산해관의 요지에서 50만 병력으로 난공불락 기세를 자랑하며 막고있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이자성에 의해 가족이 죽임을 당하자 청에 투항해버리는데, 결국 오삼계를 앞세운 청은 이자성의 난을 한달 조금 넘은 기간만에 제압하게 됩니다. 실리외교라는 것은 이자성난과 오삼계의 투항을 예견하는 능력이 아니라, 중간에서 간보다가 힘이 기울어진 쪽에 붙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결국엔 청나라는 전세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명을 치기 전에 실리외교라는 간보기를 하는 후방세력(조선)을 평정했어야 합니다.



▲ 모문룡 상


그러므로 인조가 아니어도 호란은 피할 수 없다는 학설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인데, 인조가 아니라 다른 뛰어난 지도자였다면 후금과 명의 충돌을 유도하고 이용하여 두 세력의 힘을 소진시키고 동시에 조선이 호란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 국방에 힘쓰는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조선이 유교성리학에 세뇌된 상황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기에는 국가 이념 및 국가 정신상 무리입니다. 고려와 조선이 중원의 한족 황실들을 섬기고 있을 때, 거란족과 몽골족, 여진족들은 고려와 조선에 상대도 안되는 작은 가족단위의 조직체에서 강력하고 거대한 군사조직으로 결집하여 중국과 한반도를 쳐서 정복하는 상황이 여러 번 나옵니다.



▲ 말타기에 능한 유목민


왜 만주와 몽골지역에서는 그것이 가능했던 걸까요? 왜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할까요? 물론 농경지역과 유목지역에서 보이는 생활형태 차이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하지만, 기온에 따라 농경지역 민족이 강성할 때가 있었고 유목지역 민족이 강성할 때가 있었다는 것은 학계의 정설입니다. 농경지역이 강성할 시기에도 한반도에 위치한 국가들은 후금과 같이 세력확장을 하지 않습니다. 소중화 사상과 유교정신으로 이미 조선이 넘지 말아야할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그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서는 그 한계를 명확히 지키는 자들이 항상 권력을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고 어쩌면 한국인들의 DNA에 각인되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 내전 성향인 6.25. 한국전쟁


평화는 인류가 추구해야할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전제조건은 잠재적 적국, 상대국 또한 평화를 추구해야 서로 합의된 공통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지 혼자만 꿈꾸고 있으면 불가능한 것이죠. 때문에 일정 시기에 한 국가를 지배하는 시대정신과 이념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만들어가는 내용입니다.


정도야 어쨌든 조선의 인조도 결국 시대가 만들어낸 사상에 의해 움직였고 패착을 두었으며 많은 조선 백성들을 힘들게 한 것입니다. 딱 잘라 인조만의 잘못이라고 하기엔 조선의 상황이 너무 암울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고만고만한 세력이 정권 탈취싸움을 하여 인조라는 승자가 나온다고 해도, 외부세력인 청과 명 그리고 왜와 경쟁이 되지 않았던 것이죠.


▲ 새로운 희망


지금은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어떨까요. 자신의 명예와 권력 그리고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국민들을 속이고 선동하여 정권을 차지하는 것은 아닌지, 그 대한민국 지배층과 국가 운영 리더들이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 국민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는 제대로 분석 판단해봐야 합니다. 현대의 국가 수장들과 과거 조선 왕 인조는 크게 다를 바 없을 수 있습니다. 말로는 백성을 위하며 눈물 흘리지만, 결국 백성들을 소모품이자 자신들이 높게 설 수 있는 발판의 구성물로 여길 뿐일지 파악해야 하죠.


때문에 좋은 정책과 시스템을 구성할 능력이 있고 이것을 실행할 의지가 있으며 국제관계에서 국민들의 이권을 확실히 보장하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할 인물을 골라내야 하는데 이를 해내기 위해서는 국민들 전체의 안목이 상향조정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다가올 대한민국의 새롭고 합리적인 시대정신에 희망을 걸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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