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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홍경래의 난 : 민란이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과 이유

흔히 우리 역사에서, 홍경래를 조선 후기 민란의 시초적 인물로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홍경래가 난을 일으킨 지 5개월만에 조선의 군대인 관군에 의해 평정당하죠.


이상하게 우리 역사에서 민란이 결과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거의 없다고 표현했지만 한 건도 생각이 나지 않네요. 그러나 정작 이웃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과거에 하층민이 난을 일으켜서, 그 난을 주도한 자가 집권한 경우도 있고 그가 의도한 바 뜻을 이루게 되는 케이스도 꽤 있죠.


19세기 초, 조선 순조 왕 때 벌어진 홍경래의 난(1811)을 살펴보고 그 때의 시대상황, 발생 원인,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역사에서 왜 이런 민란은 항상 진압되고 실패하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보려 합니다.



▲ 홍경래 (1780-1812)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군 출신으로서 애초에 몰락한 양반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요즘 학계에서는 몇 가지 이유(홍경래 아내가 평민, 홍경래의 난 관련 기록에 다른 양반 출신 가담자는 양반임을 알 수 있는 표시를 해놓는데, 홍경래는 그런 표시가 빠져있다는 등) 를 들어 홍경래를 평민출신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홍경래는 병법과 일종의 예언서인 《정감록》에 능통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당시 과거에 실패하고 묏자리 (묘자리) 등을 보는 풍수지리 전문가로 전국을 떠돌며 뜻이 맞는 사람들과 같이 오랜 기간을 거쳐 민중 봉기를 계획하고 준비하게 됩니다.




▲ 홍경래가 점령한 지역 (분홍 점)

※ 분홍점 (정주성, 가산, 박천, 송림, 다복동, 태천, 곽산, 선천, 철산, 용천)


위 지도는 현재 북한의 청천강 이북 지역 지도를 가져와봤습니다. 대동강 바로 위에 평양을 기준으로 삼아 보시면 편할 듯 합니다. 청천강 이북의 평안북도 지역 서쪽에서 홍경래가 활동하였는데, 다복동이라는 곳에서 홍경래는 우군칙과 상인들을 규합하고 활동을 시작합니다. 빨간색 화살표는 홍경래 세력의 진격루트를 표현해봤고, 파란색 화살표는 조선 관군이 홍경래의 난 주동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진군한 루트입니다. 결국 정주성에서 홍경래 일당은 관군에 의해 토벌당하고 성안에 많은 백성들이(약 1,000명) 참수당하게 됩니다. (여자와 10세 미만 아이 제외)



▲ 송나라의 발전된 상업


홍경래가 민중 봉기를 일으키며 내세운 명분은, 평안도 지역(서북면)과 평안도 사람들에 대한 조선 정부(조정)의 차별 타파였습니다. 평안도는 청나라와의 무역으로 인해 상업이 발달하여 다른 조선 지역에 비해 재정이 풍부했고 농사도 무리 없이 잘 되는 상황에서, 지역 특성상 잦은 사신접대 등의 비용을 자체적으로 감당하라는 조정의 정책으로 인해 세금도 서울로 보내지 않는 잉류지역이 되어 경제력은 높아지고 덩달아 평안도민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높아지며, 확대되는 교육으로 인해 백성들의 자각 수준이 상승하니 조선의 뿌리깊은 서북면 차별에 평안도인들이 반기를 들게 된 것입니다.



▲ 프랑스 혁명 (1789-1794)


프랑스 혁명을 보면, 초반에는 부르주아 유산계급이 혁명을 주도했지만 결국 무산계급이 꾸준히 합류하게 되어 혁명 세력의 원동력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이와 비교하여 홍경래의 난을 살펴보면 초반에는 홍경래 등 난의 주도세력과 지역 향인들, 거상들이 민중 봉기를 주도하지만 정주성에서 관군의 압박에 대항하며 농성할 때부터는 관군의 무차별 양민학살에 못마땅해하는 백성들이 정주성의 홍경래 세력에 합세하여 오랜기간(약 3달) 정주성을 방어하게되는 구성원 변동 흐름면에서 비슷한 점을 찾아 볼 수도 있습니다.



▲ 홍경래를 살해하려는 김대린


홍경래의 난 세력 안에서, 우선 진격로에 대한 내부 갈등이 있게되는데, 김대린은 전략적 요충지인 '안주' 부터 공격하여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게 됩니다. 홍경래의 책사인 우군칙이 김대린의 주장을 묵살하고 대원수인 홍경래가 우군칙의 손을 들어주자, 김대린은 홍경래를 살해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김대린은 결국 홍경래에게 부상만 입히고 살해하지 못한 채 잡히게 되어 처형당하죠. 많은 학자들이 홍경래의 난이 실패한 중대한 이유로 김대린과의 내부분열, 안주성 획득실패 그리고 홍경래의 부상으로 전열을 다듬을 시간이 필요하게되자, 반대로 조선 관군이 전세를 정비하여 홍경래의 난 세력을 본격적으로 압박하게 된다는 것을 들고있습니다.



▲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농민군 수장 이자성 (1606-1645)


1644년 중국지역에서는 명나라가 농민군의 수장인 이자성에 의해 멸망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명나라 자체도 하층 신분인 농민이었던 주원장이 세운 나라였는데 그 명나라가 하층민인 이자성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 한반도의 역사에서는 한 번도 찾아 볼 수 없던 장면입니다. 홍경래와 이자성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민중 봉기와 민란이, 끝내는 정부군에 궤멸당하는 이유를 자체 내부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문화가 비슷한 이웃국가들의 경우와 비교해서 보게되면, 홍경래의 난이 실패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 이자성의 농민군 세력


이자성이 활동한 당시 중국 명나라는 정치는 어지러웠고, 외세인 후금군과의 전쟁으로 백성들에게 높은 세금을 물려 백성들의 고혈을 빼고 있었으며, 당시 지구촌에는 소빙하기가 도래하여 농사와 축산의 성과가 떨어져 수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명나라 황실에 대한 민심은 바닥을 기고 있던 상황입니다. 홍경래가 활동한 조선 후기도 세도정치로 백성들이 어려운 삶을 이어가던 시절이었는데 명나라 말기 상황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죠. 명나라에서는 삶이 어려운 농민들과, 급여가 밀려서 군대를 탈영하게 된 전직 군인, 전직 관료, 노동자들이 본연의 위치에서 많이 이탈된 상황이었죠. 1628년 왕가윤이라는 사람이 이런 사람들을 모아 봉기를 일으키고 이자성은 여기에 합류하여 명나라 군대와 맞서 싸웁니다.



▲ 농민군과 휴식하는 이자성


그러나 명나라의 반란 토벌에 의하여 왕가윤은 사망하게 되는데, 이미 농민군에는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경험이 있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던 상황이었습니다. 고영상이라는 자가 자신을 '틈왕' 이라 명명하고 농민군을 이끌며 대대적인 명나라의 토벌군과 맞서게 됩니다. 하지만 고영상은 명나라 토벌군에 의해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잡혀 처형되고 토벌군을 피해 도망친 이자성이 고영상 뒤를 잇게 되는데 이 때부터 양상이 많이 달라집니다. 이자성은 점령지역 토지를 개혁하여 농민에게 재분배하여 나눠주고, 부패한 지역 관리를 처벌합니다. 또한 농민군 내에 엄격한 규율을 세워 점령지의 백성들의 인명과 재산을 해치는 일을 엄금하죠. 흩어진 농민군 무리와 백성들이 이자성을 따르며 이자성의 농민군 세력은 급격히 늘어나게 됩니다.



▲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1611-1644) 의 죽음


여러 전투를 승리한 이자성은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대순 이라는 국가를 선포합니다. 그러고는 북진을 하여 명나라 황제가 있는 북경을 향하죠. 당시 명나라는 강력한 청나라 (후금)와 전쟁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명나라의 정예군인 50만 병력을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이끌며 요서지역 산해관에서 청나라 군대를 막고있던 상황이었죠. 청나라는 조선 왕 인조의 항복을 받으며 후방세력을 평정한 상태였기에 오직 명나라 공격에 올인할 수 있던 상황이었고 명나라는 외부에서는 청나라, 내부에서는 농민군 반란 세력을 상대하며 양쪽으로 전선이 넓어지고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결국 자금성이 함락되자 명 황제 숭정제는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매달아 자결합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1598)


이제 홍경래와 비교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범한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져보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신분이었는데 당시 명분가 다이묘인 오다 노부나가의 심부름꾼으로 활동을 하다가 오다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어 점차 부대를 지휘하는 위치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쿠테타를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를 죽이게 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마지막에 남긴 '적은 혼노지에 있다.' 라는 말은 내부의 적을 유의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으키는 명언으로 유명해집니다.)



▲ 오다 노부나가 (1534-1582)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상황을 정리하고 오다 노부나가 세력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당시 일본의 센고쿠 시대 (전국시대) 는 전국의 실력자들이 권력을 잡기위해 서로 전쟁을 하던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수 많은 전투를 겨험하고 부대를 통솔하며 실력을 키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농민의 아들 출신이었지만 일본 최고의 집권자로 서게 되죠.



▲ 궁예(左), 왕건(中), 견훤(右) - KBS사극 태조 왕건


이제 다시 우리 역사로 돌아와보면, 미천한 출신은 아니였지만, 신라 왕족 출신인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고 그 궁예의 세력에 상인의 아들이었던 왕건이 투항하여 합류합니다. 궁예를 주군으로 모시고 여러 전투를 경험한 왕건은 결국 궁예를 축출하고 궁예 군대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죠.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마저 정리하게 되자, 신라 왕 경순왕이 왕건의 고려에 귀순하게 됨으로써 왕건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의 창업자인 태조가 됩니다.



▲ 미국 독립 전쟁을 지휘하는 조지 워싱턴


홍경래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고, 매번 한반도 땅에서 기득권에 대항하여 일어난 민중봉기 및 민란들이 계속 진압당하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감이 이제 잡히시는지 궁금합니다. 홍경래는 민중 봉기를 일으키며 세력을 규합하는 명분으로 오로지 평안도 지역에 국한되는 지역차별 건을 들고 나왔습니다. 반면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은 모든 백성들을 솔깃하게 만들어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토지 개혁과 토지분배를 실행하였죠. 또한 명나라든 일본 전국시대든 우리나라의 후삼국시대든, 당시 농민군 반대 주축세력은 여러 적들을 상대하며 전선을 넓혀야 했고, 힘을 한 곳에 결집시키지 못하여 새로운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야 했던 것이죠. 



조지 워싱턴 (1732-1799, 미국 초대 대통령)


하지만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 조선 조정에서는 딱 하나, 홍경래를 토벌하는데 힘을 집중 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정책에 반대하여 민중 봉기를 일으킨 미국 독립전쟁을 보면, 미국대륙의 모든 식민지인들 (미국인들) 의 이해관계를 자극하는 독립선언서가 있게 되고, 이어 미국은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느라 그만큼 전세계에 전선이 넓어지는 결과를 초래한 상태였고, 신대륙에서 벌어진 미국 식민지 반란을 진압하는데 영국의 일부 군 부대만 미국 식민지인들과 싸우게 되는 형태가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미국 식민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죠.



▲ 얼어붙은 델라웨어를 건너는 조지 워싱턴과 독립군


따지고 보면 홍경래는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이길 수 없는 동료들과 함께 하였고 이길 수 없는 상대(조선 세도정치 위정자들)에게 싸움을 걸었던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자성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왕건 과는 다르게 홍경래는 실제적으로 관군을 상대하여 승리의 경험도 없었고(대부분 성 안의 내응세력이 성문을 열어 무혈입성), 홍경래 자신이 실력을 쌓을 동안 (인큐베이터 안에서 역량을 키운다고 비유할 수 있는 상황인) 자신을 지켜주는 울타리의 역할을 할 주군의 조직에 속하는 소중한 경험을 겪지도 못했습니다. 상인들과 향임들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홍경래의 세력에서 빠져나와 오히려 의병이란 이름으로 홍경래 세력을 공격하기도 하죠.



▲ 《정감록》


홍경래가 익힌 선동술인 정감록 같은 미신으로는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역부족이었고 당시 위정자 세력인 세도정치 가문은 외세의 침략도 받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안 좋은 시기에 홍경래가 난을 일으킨 것이죠. 한반도에서 일어난 대부분이 민중 봉기와 민란은 홍경래와 같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그 사람들은 승리의 공식을 모르는 것이죠. 홍경래가 겪은 내분은 어느 조직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이 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홍경래의 난이 실패한 원천적이며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민란과 민중 봉기가 없도록 나라에서 좋은 정치를 해나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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