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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조선 왕 정조 : 정조가 과장 평가된 개혁 군주인 이유

정조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온 학자들도,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성군이라 평가받는 왕들을 섣불리 비판하는 입장을 보여서 대중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자신이 대중의 공공의 적이 될까 두려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티비 등의 대중매체에 나와서 인터뷰를 할 때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정조의 모습만 부각하고 호평하길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조선 전기의 세종대왕과 조선 후기 정조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면 계속될 수록 정조는 분명 치적도 있지만 실패하고 낡은 사상으로 인하여 분명 조선이라는 국가사회의 발전을 저해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 또한 정조 왕이 조선시대에서 손에 꼽히는 성군임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중에 풀린 정조에 관한 서적이나 출판물, 매스컴에서 평가받는 정조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평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 그 부분을 정확히 짚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정조를 어떤 식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함께 논의해볼까 합니다.



정조 (1752-1800, 본명 : 이산 or 이성) 초상, 선원보감 中


조선의 22대 왕을 역임한 정조는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현경왕후) 의 아들입니다. 영조와 사도세자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전에 포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밑에 바로가기를 걸어놓을테니, 혹시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영조의 이복 형이자 선대 왕이었던 경종에 대해 먼저 알아보고 정조에 대한 이번 글을 보실 분은 그런 순서로 이어가시면 확실히 당파들에 대해 쉽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선 왕 경종 : 경종이 끝내 영조를 죽이지 않은 이유 <---바로가기

영조 :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의 탕평책이 허울 뿐인 이유 <---- 바로가기



▲ 정조 가계도


위 정조 가계도를 보면,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와의 사이에서 정조의 다음 왕인 조선의 23대 왕이 되는 순조가 있게됩니다. 정조는 죄인(사도세자)이 아들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재임 초기부터 암살의 위협을 여러 번 겪게 되기도 합니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노론쪽 당파와 가까웠고 이 노론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당했다고 여기는 노론 벽파와 사도세자의 죽음에 연민을 느끼는 노론 시파로 분리되는데요, 결국 노론 벽파와 시파, 남인과 소론이 있게되는데 정조 재임 초기, 정조는 외척인 홍국영에 힘을 실어주고 어느정도 안정기가 찾아오자 홍국영을 제거하며 자신의 정치를 펼치는 환경을 만들게 됩니다.



▲ 정조 표준 영정


정조 오리지널 어진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때 관리부실로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위의 정조 어진은 최근에 그려진 정조의 상상 어진입니다. 정조는 어릴 때부터 스승인 김종수에 의해 왕으로서 가져야할 태도와 마땅히 해야할 일들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착실히 실천해나갑니다. 대표적으로 정조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데 자주 쓰이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 정조의 마음인 만천명월주인옹


'만천명월주인옹'의 의미는 각기 다른 형태의 물에 비치는 한결 같은 달빛처럼, 정조 스스로가 수 많은 백성들에게 달빛처럼 밝게 비추는 군주가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정조의 마음에서, 왕은 통치자인 동시에 마땅히 학문에 대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며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김종수의 가르침을 끝까지 잊지 않고 정치로 이어가고 실현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죠. 만인을 포용해야한다는 가르침도 있었는데 그것을,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게하는데 책임이 없지 않은 노론도 포용하여 탕평으로 개혁 정책을 추진하려고도 합니다.



▲ 심환지 (1730-1802), 노론 영수


최근에, 정조가 노론 벽파의 영수인 심환지에게 보냈었던 비밀 어찰(왕의 편지)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있는 내용을 살펴보니 그동안 심환지 등이 정조를 독살했다는 가설의 설득력을 상당히 약화시키는 관련 근거들이 나오게 됩니다. 발견된 어찰에서 정조가 심환지를 상당히 신임하고 중히 쓰려는 내용이 확인되는데, 결국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게하는데 책임이 없지 않은 노론파도 끌어 안으려 했던 것이죠. 이러한 포용정책을 보면 정조는 확실히 정치 9단이면서 왕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여 불필요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 뛰어난 인재들를 활용하는 것을 중히 여긴다는 그러한 정조의 그릇 크기를 알 수 있었습니다.



▲ 채제공 (1720-1799) 남인 영수


사람들이 특히 정조를 좋아하는 이유가, 뛰어난 업적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남인 영수인 채제공을 앞세워서 '신해통공'을 실시하여 시전상인의 독점권을 혁파하게 됩니다.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들의 독점 판매권을 파기함으로써 노론의 정치자금을 막고 어떤 상인이든 자유롭게 상행위를 하게하여 자유경쟁시장을 열어 줍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당시 신해통공으로 인해 영세상인은 득을 보지 못하고 거상, 도매상인인 사상도고 업자가 상당히 큰 이익을 쌓아서 도리어 물가가 오르게 되지만 경제학적으로 살펴보면 사회경제가 발전할 때 자본의 집중이라는 필수적인 단계의 도래로 인해 정부가 하기엔 비효율적이고 영세상인이 접근할 수 없는 축적된 거대자본의 투자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산업발전형태가 나오게 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유럽과 달리 조선에는 신해통공이 상업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아 주식회사 형태 등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 수원 화성


채제공에게 수원 화성 공사를 일임하여 책임지게 하고, 정약용에게 거중기를 발명하게 하여 화성 축조 공사효율을 상당히 높일 수 있게 되어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킬 때 의무라는 명분으로 무임금으로 부렸지만, 수원 화성을 축조할 때는 모든 노동자에게 농동비를 지금하고 이런한 내용을 세세하게 기록해둡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모습과 누구에게 얼마의 임금을 지불했는지, 공사에는 어떤 재료가 어느크기로 쓰였는지가 전부 기록되어 있어서 수원화성이 전쟁으로 소실되지만,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하여 다시 재건한 모습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수원에 있는 화성입니다. 



직접 찾아가면 더 좋겠지만, 여건이 되지 않는 분들은 포털 지도 서비스에서 로드뷰 (자동차나 사람이 움직이며 여러장의 사진을 찍어 현장감있게 둘러볼 수 있는 서비스) 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저도 이렇게 화성을 지도서비스를 통해 구경해봤는데 야간에 둘러볼 수 있었고 조명과 함께 어우러진 수원 화성이 상당히 멋지더라고요.



▲ 규장각


정조하면 자신의 왕권광화를 위해 인재를 키우는 곳으로 설립한 유명한 시설인 규장각이 떠오릅니다. 규장각은 정조 직속의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이고 기존 당파를 견제하는 세력을 키우는 목적이 가장 강했죠. 특히 서얼(서자: 양반과 양민 여인 사이에 나온 자식, 얼자: 양반과 노비 여인에서 나온 자식)을 과감하게 등용하는데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서이수 등이 정조 측근인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됩니다. 



▲ 화성능행반차도 (정조의 어머니와 함께 사도세자 능 행차)


초계문신 제도를 운영하는데, 37세 이하의 당하관 중에서 유능한 인물을 초계문신이라고 부르면서 규장각에 학문을 닦게 하고 40세가 되면 등용시켰는데 초계문신 또한 정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밀어부칠 정책의 후원자들을 키워내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정조는 조선시대 그 어느 왕보다 지방에 암행어사를 많이 파견(60회)하여 지방 세력을 통제하였고 지방의 향약을, 왕의 명을 받는 수령이 직접 주관하게 하기도 합니다.


특히 규장각으로 자신을 자지하는 문신을 키웠다면 정조의 친위 군부대인 '장용영' 설치하여 노론에게 분산된 군권에 대응하는 군세를 키우기도 합니다. 드라마 추노로 유명한 도망간 노비를 잡는 '노비추쇄법' 을 폐지하였고 장인등록제를 폐지하여 일정 정도 수공업을 활성화 시킵니다. 이렇듯 정조의 업적은 그의 확고한 개혁의지만큼이나 분명했고 거칠 것 없었습니다.



▲ 《대전통편》


정조는 학술 및 편찬 작업도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기에 성종 대에 완성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과 영조 대에 편찬된 《속대전》을 함께 재정리 하여 《대전통편》을 집필하게 됩니다. 그림으로 무예를 설명한 무예도보통지》, 외교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 경제에 관련된 내용을 호조에서 여러 사례를 취합 정리한 《탁지지》 등 많은 서적이 편찬됩니다. 학문을 추구하는 왕으로서의 개인 저술 문집인, 정조 자신이 쓴 책인 《홍재전서》 도 있습니다


정조는 능행 행차를 연간 평균 3회 정도 하는데, 이는 역대 조선왕 들 중 최고 기록이며 이때 백성들이 꽹과리와 징을 치는 격쟁활동으로 왕에게 민원을 접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민원 접수인, 백성들의 격쟁과 선비들의 상언을 받는 기회인 능행이 많다는 건 그만큼 정조가 백성들과 소통을 많이 하려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도 합니다.



▲ 정조의 친필 어찰 (왕의 편지)


위 사진은 정조가 신하에게 보내는 친필 편지인데 빨간 동그라미 부분에 보면 뒤쥭박쥭이라고 써 놓은 문구가 보일 겁니다. 이렇게 정조는 특별한 격이 없는 문체와 욕설 등도 상당히 많이 활용하는데, 정작 실학자인 박지원 등의 새로운 문체는 탄압하여 문체반정을 일으킵니다. 문제를 바르게 잡는다는 뜻인 문체반정으로 박지원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강요를 하며, 과거 주자의 기록물을 모아 발간하여 고문체를 그대로 확립하려합니다.



결국 정조는 유교 성리학의 수호자를 자처했고, 실학이나 고증학 등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받아들여 세계화의 흐름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게 되는데, 이는 정조 또한 유교 성리학 이념의 기반에서 세워온 조선 왕실을 수호하고 지켜야하는 조선의 왕이었기 때문에 댑분의 정조 정책은 왕권강화라는 최고가치의 목적을 추구하기위한 여러 방안들이었다는 것입니다.



▲ 일본의 메이지유신


과연 정조가 시행한 탕평책(준론)이 백성들에게 얼만큼 도움을 주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완론탕평이라 불리우는 탕평책을 구사한데 반하여 정조의 탕평책은 준론탕평이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영조보다 적극적으로 당파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탕평책이 준론탕평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엔 왕권수호 및 강화첵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조 말년에는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의 계비인 왕대비 정순왕후와 그녀의 세력인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정조의 아들인 순조의 세자 빈으로 세도가문인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을 들입니다. 정순왕후가 죽고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자 노론 시파인 안동 김씨 가문이 득세하여 우리 잘 알고있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시기가 도래하게 됩니다. 결국엔 영조와 정조의 탕평이라는 것은 신하들 사이에서 왕이 살아남기 위한 방식에 지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당파 정쟁의 폐해는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 제국주의를 풍자한 그림


1800년대 중반 이후 조선에서는 세도정치로 민생이 파탄나고 정치는 어지러울 때, 전세계에는 식민지 개척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으로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세계의 제국화 흐름에 동참하여 침략전쟁을 일으킬 힘과 명분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 첫번째 희생량은 조선이었고, 그로 인하여 또다시 조선의 백성들은 생지옥을 겪게 됩니다. 실학자들을 우대하고 이들의 실용적 사상을 조선에 널리 퍼트려 빠르게 세계의 문물을 수용하고 내부적 발전을 이뤄냈다면 일본이 그렇게 쉽게 조선을 침략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오로지 전제 왕권의 강화 뿐이었던 정조의 탕평책은 결과적 그리고 시기적으로 완전한 패착이었던 것입니다.



▲ 강력한 왕권


만약 정조가 조선 초기나 중기의 왕이었고 이때 준론 탕평책을 썼다면 지금과 같은 정조에 대한 과한 평가도 아깝지 않다고 봅니다. 모든 일은 때에 맞게 이루어져야 하고 조선 초중기의 탕평책인 왕권 강화책이 시행되면 신권을 약화되고 결국 백성들을 착취하는 신권이 약화되니 백성들이 그나마 비교적으로 살기 괜찮아지는 역학구조 관계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왕권강화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유리한 정황이 만들어지니 그토록 우리는 왕권강화를 관심있게 연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정조 때는 다릅니다. 이때는 실학자들과 같은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문물, 새로운 가치가 우선되어 세계화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그에 맞춰 조선내부를 개혁해야 했습니다.



▲ 적국의 신식 탱크에 맞서는 폴란드의 낡은 전투방식인 기마병들


많은 분들이 정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나마 조선에서 이렇게 백성들을 위한 애민정신, 소통 및 드라마틱한 삶, 문화적으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정조는 근본적으로 사회구조를 개혁하는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운명(왕의 입장)이었고, 자신과 조선의 왕족을 지키기 위해 문체반정을 실시하고 선교사들을 죽여버리는 것을 통해 연역적으로 판단컨대 왕정을 하는 전제적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당시 세계의 국가들과 힘의 균형을 이루며 주권국가로서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한 낡은 구조의 수호자가 정조였던 것입니다.



▲ 개혁과 혁신은 기존의 모습과 '다름'에 있다.


저번 영조 포스팅과 함께 정조를 하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본 포인트가 바로 시기입니다. 세도정치를 불러오는 정조, 그리고 탕평책의 진정한 의미를 시기를 고려해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죠. 결국 개혁과 혁신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제도, 새로운 구조 등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회사에 다닐 때 당시 임원진이 신입사원들에게 설교를 하던 말이 기억납니다.


임원 왈 "이제 우리 회사는 혁신을 하려한다. 혁신이란 가죽을 새로 바꾼다는 말로 상당히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기업으로 탄생시기키 위해 반드시 해내야하는 일" 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그 임원의 말을 막고 이 말을 하고싶었습니다. "혁신과 개혁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능력있는 새로운 사람을 들이고 그 사람이 개혁을 주도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데, 여전히 지금 이 회사의 사장 및 임원진은 예전과 마찬가지의 인사로, 사장 및 이사진들인 고위직의 사람들은 그대로이면서 신입사원에게 혁신을 운운하는 건, 공염불입니다. 이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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