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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수양대군 : 세조를 평가할 때 알아야 할 중요한 포인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고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수양대군(세조)의 잔인한 모습과 무서운 권력욕은 호사가들에게 안성맞춤 소재거리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극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역사관련 책이나 글에서 많이 수양대군에 관련된 내용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수양대군이 왕위찬탈 후 조선 왕 세조가 되는 과정에서의 자신의 형제들과 많은 대신들을 죽이는 장면, 왕위 된 세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인 단종복위운동을 벌이는 사육신들과 그 관계자들을 잔인하게 처단하는 장면, 그리고 어린 단종을 유배보내고 사약을 내려 죽이는(사사) 장면 등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어 대중들에게 보여지고 현대의 사람들은 조선 후기 사림파 유학자들이 그러했듯 수양대군(세조) = 왕위찬탈 = 무섭고 나쁜사람 으로 일관시켜 생각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수양대군(세조)를 평가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를 빼놓고 무조건 세조를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는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수양대군(세조)를 바라보도록 해보겠습니다.



▲ 세조 (1417-1468, 수양대군, 본명 : 이유) 합천군 해인사 어진


수양대군(세조)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입니다. 첫째는 문종, 셋째는 안평대군이고 그 밑으로 여러 형제가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어렸을 때 부터 활을 잘 쏘고 승마를 잘 하는 무인적 기질로 형제들 중에 특출난 재주를 보였다고 합니다. 수양대군 자신의 할아버지인 태종과 비슷한 기질을 보이기도 해서 당시 신하들이 왕권을 먹어들어오는 상황에 불만이 많아 결국 난을 일으켜 스스로 집권하는 것도 할아버지인 태종과 손자인 수양대군(세조)이 일맥상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 세조(수양대군) 존영도 (국립민속박물관)


태종과 세조(수양대군) 둘 다 왕권확립을 추구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는 공통점도 있지만 미세하게 차이점도 있는데, 태종은 외척과 태조 때의 공신(정도전 등) 그리고 왕실친족을 철저히 배척하고 관료세력을 키워 국가를 정비하지만 세조(수양대군)는 태종과는 반대로 김종서와 황보인 같은 관료세력을 배척하고 외척세력과 한명회, 권람, 신숙주 같은 인물들로 구성된 공신 세력을 키워 수양대군(세조) 자신의 측근으로 두는 모습을 보입니다.



▲ 태조 이성계 (1335-1408)


역학적으로 당시 조선에서 태종과 세조(수양대군) 둘 다 자신의 아버지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의 부작용을 간파하여 이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에서 세조(수양대군)과 태종이 정변을 일으키는 것인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할 때 정도전 등의 공신 등이 왕권과 맞먹는 신권을 가지고 나라를 정비해나가던 상황에서 이에 분개한 태종 이방원이 그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신진관료세력들을 키워 태종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게 됩니다.



▲ 세종 이도 (1397-1450)


수양대군(세조) 또한 자신의 아버지인 세종이 수양대군(세조) 자신의 정적이 될 가능성이 있고 그런 대신들의 권한을 크게 키워놓은 상황에서 허약한 신체를 가진 수양대군(세조)의 형인 문종이 빨리 죽고 그의 아들 단종이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니 김종서나 황보인같은 대신들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김종서가 추구하는 개혁으로 인해 왕족의 권위가 떨어지며 수양대군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계유정난이라는 결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조조와 원소의 관도대전 (그들만의 권력다툼 리그)


결국 백성들이 투표로 자신의 지도자를 뽑은 상황이 아닌 이상, 단종이든 세조(수양대군)든 정도전이든 태종이든 이들이 투쟁하여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권력투쟁을 벌이는 것이기 때문에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고 하는 것도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위에서 왕노릇을 하는 사람이 바뀐 것에 불과합니다.


왕정시대인 조선에서 실력자가 왕의 자리를 빼앗았든 아니면 조선 왕조 내에서 자신들의 정통 유교성리학 이념에 합치되는 이가 왕위을 물려받았든, 성군이 왕의 자리에 올라 그 전보다는 그나마 좀 더 나은 백성들의 삶을 만들어주는 왕이 탄생했다면 그것을 중점적으로 연구해서 그 왕을 평가 및 판단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왕실의 족보(선원보감)에 그려진 세조


세조(수양대군)의 업적이 뭐가 있을지 핵심적인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면리제와 오가작통법을 실시하는데, 오가작통법이란 5개의 가구를 1개의 통으로 묶어서 관리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세금과 사람의 노동력을 거둘 때 파악하기가 쉬워 국고의 상황이 좋아지고 국방력이 높아질 수 있는 제도이고, 면리제도 도입하는데, 한명회가 제안한 이 행정시스템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의 헌법이라 여기는 《경국대전》을 펴찬하기 시작합니다.




▲ 경국대전


이런 경국대전과 같은 기록들은 지금 우리가 조선이라는 국가와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참고자료로 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국방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군사 시스템을 진관체제로 바꿔서 국경을 방비하고 백성들을 변방으로 옮겨살게하는 사민정책을 강화하여 국가의 영토를 잃는 사태를 방비하고 변방의 땅을 개척하여 생산성이 있는 땅으로 변모시켜 경제력 면을 제고하려는 노력이 보입니다. 




또한 전현직 관리에게 토지를 지금하던 과거의 관행에서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1466)의 시행으로 국고의 낭비를 줄이게 됩니다. 간경도감(1461)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하고 원각사를 건립(1464)하는 등 문화 측면의 발전상에 기여를 하게 되기도 합니다. 서거정 등을 시켜 경진북정(1460)이라 불리우는 그리고 강순과 남이 등을 시켜 정해서정(1467)으로 불리우는 성공적인 여진족 토벌로 조선 백성들을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는 성과도 있습니다.



▲ 원각사지 10층 석탑 (옮기기 전 모습)


세조(수양대군)은 말년에 독한 피부병을 앓습니다. 몸도 쇠약해지고 때문에 정신도 피폐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끝내 한명회와 신숙주같은 공신들에게 준 큰 권한은 계속해서 이어지고(엄청난 공신들의 사적 재산 축적의 폐해) 이들에 대한 균형추로써 새로운 견제세력인 남이와 강순 같은 무장과 김종직과 같은 사림파를 등용해보지만 세조 자신이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남이와 강순은 처단되고 김종직 등 사림파는 세조(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게 됩니다.



▲ 새로운 관점을 적용할 수 있는 지금


세조(수양대군)는 죽어서 조선시대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야 시대이념이 유교 성리학이라는 어찌보면 좀 꽉막힌 이념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상하 질서 수호에 뒀기 때문에 그렇다 쳐도,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과거보다는 좀 더 객관적으로 세조(수양대군)를 평가해볼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이 글을 보고나니 여러분들은 수양대군(세조)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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