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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최치원, 침몰하는 신라에 끝까지 남은 이유

망조가 든 국가에 끝까지 충성을 다하여 분투하는 이들은, 후세에 아름답게 포장되어 그들의 나라에 대한 연민과 충심을 본받도록, 현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그런 롤 모델로 강요되어지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으로 신라 하대에 최치원이 그렇고, 고려시대에 정몽주가 있으며 망해가는 조선의 마지막 부분에서 공화정의 신기류를 거부하고 끝까지 왕정을 고집하는 수구 세력이 그렇다.


하지만 단편적인 내용에 집착하거나 결과론적으로 판단하여 그들이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지 못하고 그런 미래를 추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면모를 일방적인 선입견을 투영하여 함부로 평가절하는 것 또한 지양해야 될 것이다.

이 포스팅에서는 신라의 유명한 문장가이자 6두품 골품제의 희생양으로 자신의 능력을 끝까지 펼치지 못한 것을 비관해 은둔하여 사라진 최치원의 삶에서 어떤 포인트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지 살펴볼까한다.




▲ 최치원 (857-908)


최치원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시 초강대국인 당나라로 유학을 가게된다. 그리고 6년만에 당나라 자신들의 입장에서 외국인들이 보는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수석으로 장원급제를 하게 되어 목표한 바를 이루지만,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라 딱히 큰 우대를 받지 못해 한직에 머무르게 된다. 



나름 당에서 출세하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최치원은 '고변'이라는 인물의 휘하로 들어가 고변을 위한 여러 대필작업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한다. 당나라에서 농민 '황소'가 일으킨 '황소의 난'이 크게 세를 떨쳐 수도인 장안을 장악하게되자, 고변을 대신하여 최치원이 작성한 '토황소격문'을 작성하는데, 문장이 상당히 자극적이고 격해서 황소가 이 '토황소격문'을 보자 좀 과장됐겠지만 놀라서 자리에서 떨어졌다는 일화까지 있다.




▲ 최치원의 황소에 대한 격문인 '격황소서'


하지만 '고변'이 장안에 있는 '황소'를 토벌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자신의 군대를 아끼는 전략을 취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도교에 심취하는 모습을 보이자, 최치원은 '고변'의 사람으로서 자신이 출세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진 듯하다. 최치원은 당나라 생활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신라의 헌강왕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인재들을 끌어다가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려 하기 때문에 최치원을 환영하지만 곧 헌강왕이 죽고 정강왕이 신라의 왕이된다. 또다시 최치원은 한직을 돌다가 진성여왕때에 이르러 시무10여조를 올려 6두품으로서 최고로 오를 수 있는 계급인 '아찬'에 까지 승진하게된다.




▲ 진성여왕 시점 본격적으로 시작된 각종 봉기와 민란들


하지만 신라는 각종 자연재해로 백성들이 삶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진골들의 권력다툼으로 국가는 제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르렀다. 신라 나라꼴이 이렇게 되자 대표적으로 원종과 애노의 난(889)이 발생하였으며 기훤과 양길이 농민반란을 주도하고 적고적 봉기(896)가 발생한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는 것도 이견은 있지만 진성여왕 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진성여왕이 스스로 물러나자 최치원도 신라의 난세를 비관하며 스스로 지리산 또는 가야산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게 된다.




▲ 당나라의 수도 장안


어린나이에 신라보다 몇 배나 크고 화려한 당나라에 가서 수많은 인종과 다양한 문화가 섞인 모습을 보고 견문이 넓어졌음에도 최치원은 끝내 침몰하는 신라와 함께 한다. 한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어째서 최치원은 모든 것을 달관하고 산에 들어가 은거해버리는 것일까.



신라 하대 즉, 신라 후기에 또 다른 최씨 두명은 최치원과 다른 행보를 보인다. 드라마 태조왕건에 나온 견훤의 책사로 유명한 최승우(?~935)는 최치원과 마찬가지로 당에 유학해 빈공과에 급제 후 신라로 돌아오나 신라의 어지러운 난세의 사회상에서 견훤이 세운 후백제에 미래를 보고 견훤에 의탁하여 대업을 이루려 한다. 


또 다른 최씨인 최언위(868-944)역시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급제한 인물로 신라로 돌아와 벼슬을 하는데, 신라 경순왕이 왕건에게 투항하자 최언위는 고려의 문신으로 간택받게 된다. 최언위의 아들들이 훗날 고려의 거란침공을 막기위해 고려 정조가 광군사를 만드는데 일조한 최광윤 등이다.




▲ 신선이 되었다는 설화 속의 최치원


하지만 일찍이 수많은 인종과 민족이 모이는 당나라에서 조차 외국인 차별대우를 받게되는 경험과, 출세를 위해 선택한 인물인 고변이 결국 당나라 황실에게 버림받게되는 등 최치원이 모시게 될 사람들을 잘못 선택한 것, 황소의 난 등 당나라의 어지러운 난세를 뒤로하고 고국인 신라로 돌아왔으나, 신라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세상이 진행되자 시무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그것을 타개해보려 했지만 진골 귀족세력의 견제로 불발이 되는 것. 


자신을 끌어주려하던 헌강왕은 금방 죽고 진성여왕은 왕위 자진하차로 최치원은 스스로 필사적인 노력을 해보지만 번번이 그러한 목표와 애써 이룬 내용이 좌절된 상황들에서 도교와 무관하지 않은 최치원은 결국 산에 들어가 속세를 등지며 모든 짊을 내려놓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 부산의 해운대구 동백섬이 최치원이 남긴 것으로 알려진 비문


현명한 새는 신중히 나뭇가지를 골라서 가려 앉는다는 고사가 있다. 최치원은 당시 자신의 주인으로 삼을 만한 인물을 여러번 택하였는데 그 나뭇가지들은 전부 부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새는 나뭇가지 뿐만 아니라 그 나무기둥으로 볼 수 있는 국가또한 가려 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낡은 골품제가 끝까지 이어져 불합리한 상황이 만연한 신라의 사회구조에서 끝까지 신라인으로 남고 싶어 하던 최치원을 보면, 고대 중국의 삼국지 조조와 그의 책사 순욱이 생각난다.



▲ 삼국지 조조의 3대 책사인 곽가(左), 정욱(中), 순욱(右)


조조의 대표적 책사라고 하면 순욱이 떠오른다. 그만큼 조조가 거병하고 난 후 초창기부터 조조를 보필하여 위,촉,오 삼국 중에 조조의 위나라를 가장 큰 세력으로 만든 일등공신이 순욱이다. 그러나 한(漢)나라의 신하이기도 한 순욱은 조조가 황제가 되어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한나라를 없애버리면 역사에서 순욱 자신이 한나라의 역적으로 기록되기에 조조가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조조의 명에 의해 숙청당한다.



이미 한(漢)나라의 400년 역사는 끝나가던 상황이었다.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 다시금 질서를 잡고 백성들의 안정을 찾아줘야 하던 그 흐름에서 자신만은 한(漢)나라의 반역자가 아닌 충신으로 기록되고 싶어 한 평생 대업을 함께한 조조를 순욱은 마지막에서 거부한 것이다.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일 수 있겠고 또는 고리타분한 수구적 이기심일 수도 있겠다.




▲ 해운대 최치원 동상


최치원 또한 조조의 책사 순욱과 비슷한 심경이 있었을 거라 본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신라 왕실의 은혜를 입어 신라의 국비로 당에 유학하고 6두품의 최고 직위까지 오르는 영광을 얻었고 신라의 녹을 먹어서 신라와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것이 신라 3최라 불리우는 지식인인 최승우와 최언위와는 다르게 끝까지 몰락하는 신라와 함께하는 최치원의 모습의 근본적 이유일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이렇게 은혜를 알고 국가에 충성하는 인물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며 역사의 주요인물로 상기하며 그 인물을 탐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신라의 왕실에 충성한 최치원은 당시 백성들이 어려움으로 난을 일으키고 봉기를 하는데 그 근본적 해결책을 다른 곳에서 찾지 못하고 이미 망해가는 신라 바운더리 내에서만 머물며 헛된 힘만 쏟고 있었다. 




▲ 최치원의 계원필경


최치원은 당시 신라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혁명가나 사상가가 아니었다. 관료 또는 당대 최고의 유학파 지식인으로서 최치원이 헌강왕에게 올린 《계원필경》에서 볼 수 있듯, 난해하지만 뛰어난 한문적 소양으로 우수한 문장을 구성하는 문장가이자 문학가이며 당시 사회상을 알 수있는 역사적 사료를 제공해주는 메신저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최치원을 좋아하고 기억하는 이유가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았고 결국 좌절감만을 안겨주는 속세를 뒤로하여 떠나는 모습이 연민을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최치원 주변에 우수한 능력과 혜안을 지닌 사람들이 있어서 함께 대업을 꿈꾸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 해운대 해변가


최치원의 자(字)는 '고운'과 '해운'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부산 해운대가 과거 최치원이 부산바다 해안의 절경에 심취하여 그 지역의 이름으로 직접 자신의 자인 '해운'으로 붙여줬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피서철 가장 가고싶은 곳 중에 하나인 '해운대'라는 명칭이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지역에 가면 그 곳을 지나친 과거 유명 인물들이 연상이 되곤 한다. 해운대에서 최치원이 신라에 끝까지 남아 최후의 신라인이 되었던 이유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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