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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이야기들/인물과 사건

장보고의 청해진이 장보고 자신을 옥죄여 오다.

후대인들이 참고하는 동아시아 원사서(특정 사건이 열거된 최초의 정통 역사서)에 적혀 나온 우리 역사 인물들 중에 당시 한반도에 속해있던 기록들보다 더 많은 기록과 호평을 외국에서 받은 인물이 있다. 바다의 신이라 불리우는 장보고가 바로 그 사람이다.


당나라 시인 두목은 당나라 역사를 적은 《신당서》 집필에 참여하는데 신라의 역사를 적은 장보고전에서 장보고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다.


당대 최고의 일본 승려로 평가받는 고승 엔닌도 장보고와 관련하여 일본 교토 북쪽에 있는 적산선원에서 적산대명신을 모시는 의지를 제자(안에)에게 표명했다고 한다. '적산'이란 장보고가 당에 있을 때, 법화원이 위치한 산 이름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당나라에서 일본의 엔닌 승려의 비자가 만료되어 고승 엔닌이 쫓겨나기 직전에 장보고가 엔닌을 적산법화원에 머물도록 도와줘 엔닌 본연의 소기 목적을 달성하는데 장보고가 큰 은인이 된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의 적산선원에서 모시는 적산대명신이 장보고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는 것이다.




▲ 장보고 (787-846)


장보고의 어렸을 때 이름인 아명은 궁복, 궁파, 활보였다고 한다. '궁'은 활이라는 뜻이고 '보'는 먹보, 꿀보 등에 쓰이는 어린아이라는 뜻의 붙임글자이니 활을 잘 쏘는 아이라는 것인데 당시 영웅들의 필수 능력으로 여겨지는 활쏘기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으로 장보고 또한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떡잎부터 알 수 있던 것이다.

신라는 그 고리타분한 성골, 진골, 6두품 계급단계가 철저한 골품제 사회의 전통을 끝까지 간직해가는 나라였다. 출신성분이 높지 못했던 청년 장보고는 모든 사람들이 능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당나라에 가기고 결정하고 거기에서 외국인 용병대인 '무령군'에 들어가 산동반도에 자리잡은 고구려 유민세력의 지도자 이사도를 제압하는 전과를 올려 출세길을 타기도 한다.




▲ 완도군에 있는 장보고 동상


하지만 장보고는 어떠한 이유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돌연 외국인 용병대의 높은 군사직위(군중소장)를 뒤로하고 신라로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일본에서 통역사를 구하는 기록이 나오기도 하고 중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시장조사같은 활동을 하는 모습이 기록되기도 했는데, 장보고는 상당히 철저하게 오랫동안 해상무역에대한 청사진을 그리며 준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장보고는 신라 흥덕왕에게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지어 청해진을 설치하는데 왕의 재가를 받아낸다. 남도지방의 해적들을 소탕해 신라 백성들을 평안케하는 대신에 청해진이 무역을 독점하고 그 이윤을 왕실에 나눠주겠다는 제안(일부 역사학자의 주장)으로 군사 1만 또한 신라왕실에서 얻는 등, 장보고에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유리한 거래를 성사시킨다. 

당나라 무령군에서 나와 아무런 사회적 고위 신분도 없는 장보고가 어떻게 신라 흥덕왕과 담판자리를 만들 수 있었는지 일반인 입장에서 보면 미스터리이나 장보고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는 듯 하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루는 인물이니, 사람을 끌어모으는 힘과 이윤이 넘치는 강물의 맥을 짚어 바다로 나아가 돈을 쓸어모으는 데 천부적인 지능을 보이는 장보고이니, 어찌 신라왕과 대면자리를 만들지 못해 일을 그르칠 수 있겠는가.




▲ 청해진 유역 장도


청해진 세력을 거점으로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일본의 삼각무역을 완성시켜 장보고 세력은 빠르게 성장한다. 여기에 장보고가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을 신라의 왕으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자 장보고는 진골귀족계급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신무왕과의 약속인 장보고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이겠다는 내용을 못지키고 신무왕이 왕에 오른 당해에 죽게되자 그 아들인 문성왕에게 딸을 시집보내려다가 진골 귀족의 반발 및 문성왕의 지시로 장보고는 염장의 칼에 맞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된다.




▲ 적산법화원 분수대 적산신상


당시 당나라에는 신라인들이 거주하는 '신라방'과 신라인 자신들의 자치기관인 '신라소' 그리고 신라인들에 의해 세워진 불교법당인 '신라원'이 꽤 많이 있었다. 그 산동지역에서 가장 큰 법당인 적산법화원이 장보고의 지시로 완성된 것인데 장보고가 법화경을 읽었다고 해서 법화원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라 전해진다. 이때의 일화가 흥미롭다. 장보고는 신라에서 당으로 잡혀온 신라인들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어주거나 사비를 털어 신라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넓은 땅을 구입해 신라인들에게 경작을 하게 하여 자생적으로 살아가는데 힘을 보태주기도 하고 서두에 말한 엔닌 등,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어 장보고에 대한 호평이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그 내용이 나와있기도 하다.



장보고는 상당히 의로웠었고 큰 뜻을 품은 호걸적 기개가 뻗어나오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신라에 돌아와서는 청해진을 설치하여 신라국부를 상당히 높여주기도 한다. 청해진의 무역으로 부가 쌓이게 되고 나라 전체에서 사치품의 수요가 높아질 정도이니, 당시 신라의 경제상황이 과거에 비해 어느정도로 윤택해졌을지 상상이 가기도 한다. 다만 여전히 귀족들의 왕위다툼으로 인해 가렴주구적 세금징수로 대다수의 백성들은 살기 어려워 통일신라 후기엔 민란이 곳곳에서 터지기도 하는 것을 보니, 늘어난 국부는 상류층이 대부분 가져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그때에도 여전했던 것이다.




▲ 장보고와 바다


하지만 그런 호걸적 기개로 넘치던 영웅 장보고도 결국 신라의 골품제 앞에서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고 무너지고만다. 장보고 자신의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 왕족이 되려다가 즉, 신라의 골품제에 순응해 진골귀족에 편입하려다가 끝내 실패하여 장보고는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호기롭게 큰 꿈을 꾸고 당나라에 가서 출세를 했었고, 당대 신라의 국력까지 좌지우지할 만큼 큰 규모의 해상무역세력을 자신의 손으로 일궈내고 국제 판세의 흐름을 보는 정확한 눈과 신라인들을 위하는 의로움까지 갖춘 인물이지만, 평생 자신을 억눌렀던 태생적 약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신라 골품제를 무너뜨리는 방안을 구상하내거나 택하지 못하고 장보고 자신이 그 골품제의 시스템에서 발버둥치며 이겨나가려고 했던 것이 장보고의 모순적 양면성이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한 것이다.

거기에서 청해진 대사로 임명된 장보고의 한계가 있다고 본다. 장보고는 세상이 제시해준 틀 안에서 자신이 읽은 판세의 흐름에 주도적으로 승차하기 위해 그것을 철저히 준비하여 가장 정확하고 확실하며 되도록 빠른 방법을 찾아내는 데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재능을 보여온다. 그러나 그 사회의 틀을 깰 비범하고 특출난 불세출의 전략을 생각해낼 입지적 인물은 아니었던 아쉬움이 있다. 자신이 만든 청해진은 결국 장보고에게 당시 사회의 불합리한 시스템을 깨버릴 기회를 안겨줬지만 장보고의 마지막의 단 한 번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청해진 장보고의 세를 두려워한 귀족들과 신라왕의 우환제거 선택으로 장보고는 자객으로 보내진 염장에 의해 참수된다. 


장보고는 내가 오랜 과거부터 상당히 좋아하던 인물이다. 그리고 몇 번이고 장보고에 대한 얘기를 주위에서 들을 때마다 다시 그의 영웅적 기개가 내게 비추는 힘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나 또한 대한민국 기득권과 소수 리더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 내가 장보고의 실책으로 여긴 내용과 나의 삶의 기준가치가 하등 다를 게 없다고 판단되는데 그런 점은 내 자신에 실망스러울 수가 있다. 그 점을 잊지않고 기억하는 것부터 하여, 내 삶을 진전시키기 위한 걸음걸이를 시작해본다. 여러분들은 장보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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